자신과 세상을 다르게 보는 눈

     새해가 시작되는 1월이 되면, 지금처럼 그 시간이 1월말이 되는 시점이라 해도, 칼럼을 쓰는 이의 입장에서는 뭔가 실질적인 교육 문제에 대해 소개하며 정보를 제공하기 보다는 새로운 시작을 위해 좀 더 근본적인 사안에 대해 한마디 썰(설교?)을 풀어 보려는 유혹이 일어 난다. 물론 필자와 같이 어설픈 글쟁이에게 국한된 일이기는 하겠지만, 어설픔은 유혹에 쉬이 넘어지고 컴퓨터 자판은 또 다시 도덕적이고 교훈적인 색깔로 어지럽게 채워 진다.

     이러한 유혹은 아침마다 배달되어 오는 프란시스칸 신부님인 리차드 로어의 며칠 전 글에서 더욱 촉발된다. 이 분의 말씀인즉, 이사야나 예레미아 같은 성경에 나오는 예언자들이나 또는 마틴 루터 킹 주니어나 로사 파크와 같은 우리가 사는 세상 속의 예언자들의 삶을 배울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역할은 “(사회 통념상) 이야기하면 안되거나 불편한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새롭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거대한 장을 여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벌거벗은 임금님이라는 우화를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사회 통념에 익숙한 어른들은 문제를 일으켜 자신이 불이익을 받을까 두려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임금님의 옷이 너무 아름답다고 자신과 남을 속이지만, 아무리 임금님에 대해 어른들이 뭐라고 하든 어린 꼬마의 벌거 벗은 눈에는 권위의 상징이며 법의 시행자인 그가 완전히 벌거벗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보이고 또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것과도 같다.

     지난 월요일은 킹 목사님의 생일을 기념하는 연방 공휴일이었다. 우리 아이들은 학교를 쉬며 집에서 달콤한 휴식의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이번엔 이미 지나갔지만, 내년에는 또는 다른 유사한 기념일에는 이 예언자적 삶을 산 이들의 족적을 살펴 그들이 연 사랑과 평화의 삶에 대해 이야기 하면 좋겠다. 피부 색깔이 다르거나 생각이 다른 이웃에 대해 그 다른 점을 이야기하고 내가 이제껏 보지 못했던 자신의 그릇된 점은 고쳐 나가는 그런 교육의 장으로 삼았으면 좋겠다.  

     이러한 삶을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삶의 방식에 대한, 우리 삶의 내면 속에 깊숙이 자리 잡은 아집과 고집스런 생각들에 대한 성찰, 즉 나 자신을 아이의 벌거벗은 눈으로 살펴 볼 기회를 가지면 좋을 것이다. 그리고 난 후에 우리 주위에 더불어 살아 가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삶의 태도를 설정하면 어떨까?

     올 해 시도할 만한 새로운 삶의 태도에 대한 두가지 예를 소개한다. 오래 전 필자가 출석하는 교회의 목사님께서 설교 말씀 중에 인용하신 것으로, 성경에는 두가지 다른 대야가 등장한다고 한다. 하나는 예수님 당시 유대 나라에 파견된 로마의 총독이었던 빌라도가 사용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에서 사용한 것이다. 처음에 목사님이 ‘대야’에 대한 말씀을 시작할 때, 한국에서 온 지 오래된 우리에게 익숙한 ‘다라이’ 보다는 아마도 ‘큰 야망’ 즉 ‘대야(망)’을 지칭하는 것이려니 했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며, ‘대야(basin)’를 의미하는 것이어서 재미있어 했던 기억이다.

     시간상 나중에 사용된 빌라도의 대야를 먼저 소개한다. 예수님 이후의 역사와 가르침을 기록한 신약 성경의 마태 복음은 빌라도의 대야를 상세히 묘사해 전해 준다. 당시의 기득권자들인 유대인의 신학자들과 그 하수인들이 예수의 제자 중 하나인 가롯 유다의 밀고로 예수를 붙잡아와 재판을 요구하고 사형에 처하라고 외친다. 민란이라도 일으킬 기세이자, 빌라도는 예수가 죄가 없고 ‘옳은 사람’임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것과 또 민란이 일어나려는 것을 보고, (대야에)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고 말하였다.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책임이 없으니 여러분이 알아서 하시요.” 자신에게 닥칠 해가 예견되면 옳은 일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안위를 위해 손을 씻고 자신은 그 행위에 대해 아무런 상관/책임이 없음을 밝히는 도구로 쓰인 빌라도의 대야. 위의 예언자적 행태와는 정반대로 우리 사회 통념과 아주 잘 들어 맞는 행동이 아닌가? 이 사건에서 영어의 숙어인, “wash my hands of something (손을 씻음으로서 그 일어난 일이 나에게는 책임이나 의무가 없다는 어구)”가 유래했다고 한다. 한국어의 관용 어구인 나는 ‘그 일에서 완전히 손을 씻었어’와는 비슷한 듯 다르다.  

     시간상으로는 먼저 등장했던 두번째 대야를 보자. 신약 성경의 요한 복음 13장을 보면,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을 갖는 장면이 기술되어 있다. “저녁을 드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 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셨다. 그리고 대야에 물을 담아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른 수건으로 닦아 주셨다.” 그 당시의 관습에 의하면, 주인이나 방문한 손님들의 발을 씻어 주는 것은 종들의 몫이었다. 발을 씻기신 이유는 같은 장에  1)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기 때문이고, 2)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필자는 이 관습을 깨는 파격에 마음이 움직였다. 더욱 마음이 아팟던 장면은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기 전에 이미 제자들이 당신을 곧 배반할 것이라는 점을 알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행했다는 점이다. 수제자인 베드로는 다음 날 아침 닭이 울기 전에 3번이나 자기가 예수와 관계가 없는 사람이라고 부인을 할 터이고, 요한을 제외한 다른 제자들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모두 도망을 갈 것이며, 가롯 유다는 식사 후에 예수를 은 30에 팔아 넘길 것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어디선가 들려 오는 “너는 그럴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 필자의 귓가에 쟁쟁했다. 당시 사회 통념, 아니 역사를 통해 아직도 우리 주위에 지탱되고 있는 거짓된 행태에 대한 예언자적 도전을 본다.

     새해에는 우리 어른들이나 우리의 자녀들이 옳은 일이 무엇인지 깨닫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이웃을 섬기며 발을 씻어 주는 삶의 태도를 실행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의 발을 씻겨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남의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고 하시지 않았는가? 우리 아이들이 이러한 삶의 태도를 실천하면, 학력은 따라서 올라 갈 것이며, 혹시 만에 하나 학력은 최소한 제자리 걸음이더라도 그 아이의 인생은 훨씬 더 아름다워 질 것이라 확신한다.



글의 무단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