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완벽하지 않으니

이제 지난 연말에 부모님을 뵈러 고향집을 방문한 자녀들이 개인차는 있으나 각각의 학교와 직장으로 떠난 시점일 것이다. 집 떠나 타지에서 일하거나 공부하는 아이들이 보고 싶고 같이 얼굴을 마주하며 식사라도 하고 싶은 것은 모든 부모님들의 공통된 심정일 것이다. 가끔 전화나 가족 단톡방에서 서로 안부를 챙기기는 하나 직접 대면하고 손이라도 잡는 것과 어찌 비교가 되겠는가? 이제는 다 컷다고, 제 엄마가 안기라도 하는 날에는 질색하는 시늉을 하는 아들 녀석이나, 온갖 스위트한 말로 부모를 챙겨 주는 딸 아이를 생각하면 왜 이리 피식 웃음이 나고 마음 저 안쪽이 아려 오는지. 곁에 있을 때는 그리도 말 안 듣고, 공부 안 하는 것만 보이더니, 멀리 떨어져 있으니 조그마한 일이라도 같이 나누고 싶고 소소한 먹을 거리라도 좀 더 먹이고 싶은 마음이다. 부모의 마음은 참 비 이성적이고, 이는 자식들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지난 해 이 맘 때 쯤의 일이 떠 오른다. 아내를 일터에서 픽업해 집으로 가는 길에, 집에 먹을 것이 별로 없다는 아내의 걱정도 덜 겸 간단히 외식을 하고 들어 갈 요량으로 한국 식당엘 들렸다. 주문을 하고 기다리는데, 때 맞추어 딸 아이가 전화를 했다. “뭐 하세요. 혹시 바쁘신 거 아니예요?” 항상 자상한 아이라 배려하는 마음이 듬뿍 든 물음이다. “응, 아빠랑 저녁 먹고 들어 가려고 식당에 와 있어요.” “뭐, 드시려구요?” 의례껏 하는 질문에 아내는 과잉 반응을 한다. “응, 아냐, 그냥 맛 없는 것 먹으려구…” 집 떠나 마음껏 먹고 싶은 것도 못 먹을 것 같은 아이를 위한 배려에서 나온 대답이지만, 별로 이해가 되지 않는 대답이라 말을 끝내고 같이 웃어 버린다. 아이들이 자신들의 꿈을 이루기 위해 타지에서 고생을 하는 것이 안스럽기는 하지만, 꿈은 노력하고 고생을 감내하는 자만이 이룰 수 있으니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워 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리라 자위하며 ‘맛없는 음식’을 다 비웠다.

꿈과 아이들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몇 년 전 추수 감사절을 맞아 돌아 온 아들 녀석이 해 준 재미난 일본 라면 집 이야기가 떠 오른다. 하버드 캠퍼스에서 북쪽으로 기차역 하나를 지나면, 노스 포터 지역이 나오는데, 이 근처 버스 정류장 앞에 “Yume wo katare (꿈을 나누세요)”라는 아주 조그마한 일본 라면 식당이 보스턴에는 흔한 던킨 도우넛 매장과 스파 사이에 없는 듯이 위치해 있단다. 드러나지 않은 위치에도 불구하고, 소문이 나 길게 늘어선 줄에서 한참을 기다리다가 식당엘 들어 가면, 주방 쪽을 향해 긴 식탁 세 개와 각 테이블당 의자 여섯개가 학교 교실의 것들처럼 앞 사람의 등짝을 보며 앉게 될 손님들을 기다리며 놓여 있다. 메뉴는 단 두가지, 대짜와 소짜 라면으로 가격은 좀 쎈 편인 각 $11과 $13이란다. 물론 요즘같은 인플레에 지금은 훨씬 비싸졌을 터이지만. 각 메뉴의 차이는 국수 위에 얹어 주는 두툼한 돼지 고기 등목살이 각 두개와 다섯개의 차이란다. 주문을 마치면, 종업원이 “당신의 꿈을 다른 분들과 나누시겠습니까?”라고 묻는다. “그러지요”라고 하면 식사가 끝난 뒤에, “이분이 꿈을 나누시겠습니다”라는 신호에 따라 일어나 “제 꿈은 세계 각지를 여행하는 것 입니다”라는 등의 꿈을 나누는데, 이후에 종업원이 라면 그릇을 살핀뒤, 식사량을 기준으로 다음 중의 하나를 큰 소리로 외치고 식당의 다른 종업원과 손님들도 같이 합창을 한다고 한다: 많이 남기면, nice try; 조금 남기면, good job; 거의 다 먹으면, almost; 국물과 면을 모두 다 깨끗이 비웠으면, perfect.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또는 음식을 먹기 위해서는) 열정과 인내, 그리고 배고픔과 헌신이 필요한데, 위의 순서와 반대로 즉 음식을 많이 비울수록 꿈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이 많음을 말한다고 한다. 그 식당의 인스타 그램에 나온 문구: “Any Dream can be achieved with a little help from friends! Share a dream with us today for lunch 11-3 and dinner 5-10pm! “(다 아시는 것이지만, 간단히 번역하면, “어떤 꿈이라도 친구의 작은 도움으로 이뤄질 수 있습니다. 오늘 저희와 함께 꿈을 나눠 보시지요. 점심은 11-3, 저녁 식사는 5-10시까지 입니다.”) 때 맞춰, 스티브 잡스의 “stay hungry, stay foolish”가 떠오른다.

계묘년 새해를 맞아 우리 모두는 각자의 새해를 꿈꾼다. 새해의 꿈과 새해에 하는 결심은 하는 사람의 의지와 정도에 따라 조금 다를 수는 있으나 보통 같은 내용의 다른 형태이리라. 야무진 결심도 있을테고, 그저 느슨한 희망도 있을 것이다.

     필자의 개인적인 꿈은 올 해는 조금의 ‘여유’를 갖고픈 것이다. 혹시 기억 나시는 분에 계실 지 모르겠다. 고교 교과서에서 읽은 피천득 선생님의 “수필은 청자연적이다”의 그 ‘여유’ 말이다: “덕수궁 박물관에 청자 연적이 하나 있었다. 내가 본 그 연적은 연꽃 모양을 한 것으로, 똑같이 생긴 꽃잎들이 정연히 달려 있었는데, 다만 그 중에 꽃잎 하나만이 약간 옆으로 꼬부라졌었다. 이 균형 속에 있는 눈에 거슬리지 않는 파격(破格)이 수필인가 한다. 이 마음의 여유가 없어 수필을 못 쓰는 것은 슬픈 일이다.” ‘청자연적’이란 푸른빛이 감도는 자기로 만든, 붓글씨 쓸 때 사용하는 물통을 말한다. 옛적 선비들의 일상에 쓰인 물건을 만들면서, 모든 꽃잎이 정연히 배치된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일사분란한 모양이라기 보다는 한 잎을 살짝 꼬부린 그 여유를 배우고 싶다. 우리네 삶 속에서 남편으로, 부모로서, 선생으로서, 직장의 상사로서 너무 꼬장꼬장하게 꼰대처럼 살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관계를 아름답게 만들려 노력하는 여유를 갖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이 파격에는 ‘균형 속에 있는 눈에 거슬리지 않는다’는 조건이 필요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일본 예술이 추구하는 미학관을 한마디로 요약하는 말 중에 wabi-sabi라는 말이 있다. 불완전함/단순함/덧없음 등의 미학을 담은 말이라 한다. 우리의 삶에 대입하면, 완전함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이 불완전함이라는 인간 조건을 깨닫고 남을 이해하려 노력하면 보다 더 화목한 관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나와 함께 한 시대를 살아 가는 아내, 자녀들, 그리고 이웃을 대할 때, 조그마한 여유를 갖고, “그래 당신과 나 모두 완벽할 수는 없으니 서로 보완하며 살아 가세” 다짐하며 살아 가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하는 소망이다. 성경 말씀 중에,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로마서 3:10-12)가 마음에 와 닿는 새 해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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