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행동에서 주위를 배려하는 새 해

집을 떠나 뉴욕에서 생활하는 아이들과 미시간의 아노버에서 유학 중인 조카가 크리스마스를 맞아 시애틀을 방문했다. 요즘 한창 유행하는 온라인 반찬 가게에서 주문해 받은 갈비와 간장 게장을 반찬으로 크게 힘들이지 않고 크리스마스 이브에 모두가 함께 오랜만에 풍성한 저녁 식사를 나눴다. 평소엔 허전하게 비어있었지만, 오늘은 사람들로 꽉찬 다이닝 룸이 제 구실을 해 뿌듯하다며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마다하지 않고 따뜻한 전구의 빛에서 나오는 온기로 방 전체를 채워 주는 듯하다. 한자리에 모여 나누는 지난 한 해의 고생담과 무용담들로 가득찬 대화들이 눈치 봄이 없이 오간다. 고생한 대목에서는 “어휴, 오~슈웃”으로 공감하고, 자랑할 만한 일들의 구비에서는 “와아, 굿잡”으로 추임새를 주며 모두의 마음을 위로와 칭찬으로 풍요롭게 채워 준다.

     항상 그렇듯이, 가족의 대화는 우리에게서 그치지 않고, 사회 전반의 문제로 옮아 간다. “아니, 세이프 웨이에서 장을 보는데, 어떤 사람이 비닐 봉투에 여러 식료품들을 쓸어 담더니 계산도 하지 않고 나가는 거예요” “아니 그게 무슨 일이야, 돈을 안 내고 나가다니?” 사정인즉슨 아마도 돈이 없었던지, 여하튼 낼만한 사정이 아닌 어떤 사람이 절도(?)를 하는 장면을 본거였다. 요즘 유튜브와 같은 각종 미디어들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장면을 직접 경험한 거였다. “아니, 그 사람이 ‘홈리스’처럼 보였니?” “네, 그런 것 같았어요.” “그런데 아빠, 요즘엔 이런 집없는 상황에 있는 사람들의 권익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홈리스’라는 말보다 ‘unhoused’나 ‘houseless’라는 말이 더 적당한 단어라고들 말해요.” 한국의 드라마에서 가끔 등장하는, “어휴, ‘집도 절도 없는’ 것들이 항상 저런 다니까!”에서 처럼 홈리스라는 말이 좀 사람을 깔보는 용어라는 말이다. 그래서 그들의 자존감과 그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마음을 무너뜨리기에 이 용어를 다른 것으로 대체해 사용하자는 움직임이다. 반면에 ‘언하우스드’는 “모든 사람은 기본적으로 집에서 살아야한다는 (그런데 집이 없이 사니 개선되어야 한다는) 도덕적 사회적인 가정을 받아들이는 마음”을 표현하는 용어라는 것이니 일면 타당하다는 생각에 모두 고개를 끄덕인다.

     가족의 대화는 꼬리를 물어, “혹시 이번에 월스트리트 저널에서 스탠포드 대학의 “쓰지 말아야할 용어들”에 관해 쓴 기사들 아니?”로 이어진다 (https://www.wsj.com/articles/the-stanford-guide-to-acceptable-words-elimination-of-harmful-language-initiative-11671489552).

간단히 요약해 보면, 스탠포드 대학이 ‘되도록이면 사용하지 말아야 할 차별적이고 유해한 용어들을 모아 만든 목록 (Elimination of harmful language initiative)’을 공개했다. 이 단어들은 장애를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특정한 성, 즉 남성 위주의 정신을 반영하는 말들을 가능한 바꿔 쓰자는 의도이다. 즉, 어떤 단어들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특정한 사람들의 편견을 가진 인식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들이 있으니 이를 바로 잡아 사람을 포함하는 어떤 생명체 누구에게도 해가 되지 않을 말들로 대체하자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여름의 끝자락에 찾아 오는 더위를 우리는 ‘인디언 서머 (Indian Summer)’라고 부르는데, 이 말의 기원에는 게으른 ‘인디언 원주민’에 대한 백인들의 무시나 편견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한 때, 한국에서 환경부 공무원들의 ‘블랙 리스트 (Blacklist)’를 만들어 논란이 된 적이 있는데, 이것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받아들일 수 없는 잘못을 저질러 퇴출되어야 할 사람이나 단체의 목록을 의미한다. 문제는 왜 이 나쁜 것을 의미하는 단어에 ‘블랙’이 사용되고, 권장하고 칭찬해야 마땅한 사람들의 리스트를 의미하는 ‘whitelist’에는 ‘화이트’를 쓰는지가 문제라는 것이다. 다른 인종의 특징적인 얼굴색을 떠올리게 하는 흑백이 좋고 나쁨의 구별에 사용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는 것이다.

     ‘돌팔매 한 번에 새 두 마리를 잡는다 (kill two birds with one stone)’ 또는 우리 한국식으로 ‘두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는다’라는 용어는, ‘도랑치고 가재도 잡는다’라는 우리네 격언처럼, 논밭의 물고랑을 만들어 물을 대고, 이 과정에서 가재도 잡아 먹을 수 있다는 것처럼, 한 가지 일을 하는 과정에서 다른 부수적인 이익도 본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껏 사용해 온 이 어구가 토끼던, 가재던, 새던지 옛적부터 인간에게 영양을 제공해 온 고마운 동물을 무의식적으로 무시하고 학대하는 말이라는 생각에 미치면–스탠포드의 방식으로 설명해 동물에게 ‘해가 되는’ 용어라면– 재고의 여지가 있다는 생각이다. 또 다른 용어는 ‘죽은 말을 매질한다 (beat a dead horse)’로 이미 결정된 일을 자꾸 되풀이 할 때 쓰는 말인데, 역시 동물을 학대하는 모습을 연상시키기에 다른 말로 바꿔 쓰는 것이 좋다는 주장이다.

     우리네 이민자에게 의식적인 차별을 가하는 것에서 시작해 지금은 기원과는 상관없이 무의식적으로 간편하게 쓰이는 인사말인 ‘롱 타임 노 씨 (long time no see)’도 이 리스트에 포함되었다. 그 유래가 문법이나 관용어의 사용을 교양있게 못하는, 즉 영어를 잘 못하는 중국인 초기 이민자들이나 미국의 원주민의 그릇된 영어 사용에 대한 조롱에서 온 말이기 때문이다.

     이제 새 해가 다가 온다. 이 글을 읽으시는 순간은 이미 계묘년 흑토끼의 해가 밝았으리라. 올 해는 독자 여러분의 가정과 사업에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한다. 공짜로 받은 것을 주위에 되돌린다는 마음으로, 지금까지 아무 생각없이 받아 들이고 사용하던 관습을 다시 한 번 뒤돌아 보고 생각을 정리하며 남을 배려하며 나아 가는 새 해가 되기를 기원한다. 자녀가 대학을 정할 때, 무조건 랭킹과 세평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아이에게 가장 적당한 대학과 전공이 무엇인지 꼼꼼히 살펴 보는 것도 이런 노력 중에 하나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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