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불을 뒤집어 쓰고 우는 아이에게

    12월 중순이 되면, 조기 전형을 실시하는 미국의 대학들은 지난 11월초에 제출한 대학 지원서의 합/불합격 여부를 통보한다. 올 해도 지난 15일에 이미 합격자를 발표한 대학들에 의하면, 지난해 보다 합격률이 낮아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버드는 올 해 조기 전형에 9천 500여명이 지원했고, 그 중 722명을 합격시켜 7.5%의 합격율을 보였다. 이는 2년 전의 최대 지원자 수보다는 약간 낮지만, 개교 이래 두번째로 많은 지원자 수로 작년보다 합격률이 0.2 퍼센트 낮아지는 원인을 제공했다. 합격자 중에 아시아계 학생은 29.1퍼센트로 작년보다 3.2 퍼센트나 증가해 아시아계의 약진을 보여 준다. 다른 한가지 특기할 사항은 올 해부터 하버드는 합격자 중에서 가계 소득이 7만 5천불 이하인 가정에는 전액 무료 장학금을 수여한다고 하니, 우리 한인 저학년 학생들은 분발할 일이다.

     한편, 예일 대학은 7천 8백 여명의 지원자 중에서 10 퍼센트인 776명에게 합격을 통보했는데, 이 합격률은 지난 20년간 최저의 비율이라고 한다. 이 학교의 합격자 발표에서 괄목할 점은 합격 유예를 단지 20 퍼센트만 주고, 나머지 70 퍼센트의 학생들에게 불합격을 통보했는데, 이는 올 해 하버드가 70 퍼센트 이상의 지원자에게 합격 유예를, 단지 10 퍼센트 정도에만 불합격을 준 것과 비교해 파격이라고 할 수 있다.

     불합격이나 합격 유예 판정을 받은 고교 시니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머리가 지끈거려 얼굴을 펴기 힘들다. 제1지망 학교에서 거절을 받고, 이제 다시 다른 학교들에 정시 전형 지원서를 제출해야 하는 학생들의 마음이 편치 않기 때문이다. 조기 전형 불합격 판정에 방문을 걸어 잠그고 침대 위에서 이불을 둘러 싼 채  흐느끼는 아이를 보며 일면 가련한 마음이 들지만, 앞으로 지원할 대학의 에세이는 어떻하고 저러고 있나 하는 불안감에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를 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아니 너는 도대체 추수감사절 연휴 내내 에세이 좀 쓰라고 할 때는 걱정 말라더니…도대체 뭐가 되려는지, 쯧쯧” 하지 마시라. 다음과 같은 에세이 주제를 선택하게 될 지도 모르니 말이다. “Reflect on a time when you questioned or challenged a belief or idea. What prompted your thinking? What was the outcome? (당신이 어떤 기존의 신념이나 생각에 의문을 품거나 도전해 본 적이 있다면, 그 때를 한 번 돌아 보시지요. 무엇이 그러도록 만들었나요? 그 결과는 어땠나요?) 위의 에세이 제목은 원조, 대세 공통 원서인 Common application의 7가지 제목 중 하나이다. 농담이지만, 자녀들이 ‘부모님이 당연히 나를 사랑하신다’라는 신념에 회의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 말이다.

     아이들이 중고등 학교를  시애틀에서 다닐 때, 가끔 같이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아이들의 푸념 섞인 불만에 직면할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던 기억이 난다. 드라마 속에서 공부에 소홀한 자녀를 심하게 혼내는 부모를 보거나 가난한 집 아들과 결혼하려는 딸에게 폭언을 퍼붓는 부모를 보면서,  “아니 아무리 화가 나도 어찌 저렇게 무식하게 폭언을 퍼부을 수 있어요?” “정말 한국 드라마 속의 부모들은 왜 이리도 감정을 자제할 줄 몰라요?, 아빠” 쌍심지를 돋우며 드라마 속의 인물들에게 화를 퍼붓는다. 물론 이 녀석들이 내가 공부 좀 하라고 얼굴을 붉힌 것을 기억하고 이렇게 날 들으라고 한 말은 아니겠지 자위를 하지만, 괜히 마음이 쪼그라 든다. 그런데, 드라마 속의 장면들이 자꾸 아이들의 질책과 오버랩되며, 괜히 신경이 쓰여 마음 속의 나에게 묻는다. 혹시 나도 우리 아이들에게 이런 마음을 할퀴며,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말들을 무의식적으로 해 온 것은 아닐까? 물론 부모로서 당연히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하며 뱉은 말들이었겠지만, 정말 부모는 아이들에게 이런 말들을 해도 되는 것일까? “공부 좀 해라, 왜 도대체 너는 이렇게 생각이 없니. 아이구, 그저 커서 뭐가 되려고 이래?” 생각이 있는 부모가 아이에게 쉽게 할 수 있는 말들은 아니라는 생각에 정신이 버쩍 든다.

     인도의 시크 교도들은 세상에서 만나는 누구에게라도 “놀라운 면 (wonder)”이 있고, 이것을 느끼는 것이 “사랑 (love)”의 시작이라고 가르친다고 한다. 우리 아이도 물론이지만, 저 길거리의 초라해 보이는 아이도 그 가정의 부모들에게 내 자녀 만큼이나 귀한 아이들이고, 그들이 하는 작은 일도 우리 아이가 한 착한 일만큼이나 귀한 일임을 깨닫는 것이 우리 주위의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는 첫 걸음이라고 한다. 수긍이 가는 가르침이다. 성경에서도,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 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 주심이라 (마태복음 5:44-45).

     악인과 선인이 다 같이 밝은 빛과 때맞춘 비를 향유할 하나님의 자녀라면,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우리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우리 형제, 자매들이니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인종간, 종족간, 하물며 가족간에도 행해지는 온갖 유무형의 폭력 대신 남을 내 몸처럼 여기는 사랑을 실천하면,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줄 미래는 정말 살만한 신세계가 되지 않겠는가?

     이러한 ‘서로 다름’의 인정과 이해가 옳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네 오랜 인류 역사 속에서나, 또는 우리네 작금의 현실 속에서, 매일 끈질기게도 계속되는 현상 중의 하나는 자신 나름의 ‘정의’를 고집하고 남에게 억지로라도 받아 들이게 강제하는, 마음에 안 드는 상대방에 대한 물리적, 정신적 통제 행위, 즉 ‘폭력’의 행사이다. 흔한 것만 보아도, 가정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자녀에 대한 언어와 감정 폭력, 배우자에 대한 유무형의 가정 폭력, 직장내 지위에 기반한 언어및 여타 폭력, 다른 정파간의 이성을 잃은 흠집 내기 등등…. 너나 할 것없이 돌아 보고 고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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