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주어진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칼럼을 독자 분들께서 읽으시는 주말은 추수감사절 주말일 것이다. 아직 아이들이 어려서 집에서 거주하는 경우에는 온 가족이 모여 감사절의 의미를 묵상하며 맛있는 저녁과 함께 사랑을 나누셨기를 바란다. 공부하러 가까이는 캘리포니아로 멀리는 동부로 떠났던 자녀들이 명절을 맞아 집에 돌아 왔거나, 이미 학교를 마치고 가정까지 꾸린 자녀들이 손자 손녀와 함께 본가를 찾으신 가정도 있을 것이다. 이 보다 더 기쁜 만남이 어디 있으랴? 하지만, 많은 경우에는 마음은 굴뚝같지만, 추수감사절과 크리스마스 모두 집을 방문하기에는 여러가지로 쉽지 않아, 크리스마스를 기약하며 부부 두 분이 조촐하게 감사절을 보내신 분도 계시리라. 물론 일 년에 한번도 부모님 댁을 찾기가 어려운 것이 거의 정상이니 그 마저도 감사할 일이다. 요즘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화상 미팅을 통해 서로에게 안부를 전하고 사랑을 나누는 방법도 많으니, 그리 섭섭해 하지는 마시라.

이 때가 되면, 생각나는 필자의 칼럼이 있어, 약간의 수정을 거쳐 오늘 다시 나눈다: 교양이 넘치고 알뜰한 우리의 미세스 김. 연말 대목을 맞아 홍수처럼 메일 박스를 채운 갖가지 쿠폰 북을 살피다가 좀 이른 크리스 마스 쇼핑에 나섰다. 가정의 살림을 꾸려나가는 엄마로서 매년 느끼는 것이지만, 올 해는 코로나 바이러스와 우크라이나 전쟁 등의 영향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이 피부에 느껴질 만큼 거의 모든 상품의 가격이 상승한 관계로 선물을 할 분들의 리스트를 최소한으로 줄이느라 고심을 했다. 아주 소수의 분들로 대상을 좁혔지만, 정성 어린 선물들을 사느라 열심히 발품을 팔다 보니 시장하고 목이 말랐다.  마음 한구석에는 어휴 커피 한 잔 값에 조금만 더 붙이면, 리스트에서 애석하게 빠진 먼 촌수의 이모님께 작으니마 마음이 담긴 선물을 하나 해드릴 수 있을텐데 하는 주저함도 있었다. 하지만 눈을 질끈 감고 조그만 과자 한 봉지와 커피를 한 잔 사 마시며 좀 쉬기로 작정했다. 장시간의 쇼핑에 지루해진 남편이 가까운 서점에 들어간 사이 쇼핑 몰 안의 스타 벅스 커피점엘 들렀다. 사회적 거리 두기에서 공식적으로 벗어나고 거의 대부분의 쇼핑객들이 마스크를 벗어 버린 채로 활보하는 쇼핑몰 안의 길목에 위치한 커피집에 길게 늘어선 줄에서 명절을 느낀다. 각양각색의 긴 줄에서 얼마를 기다린 후 겨우 아메리카노 커피 한 잔과 마들렌 쿠키 몇 조각을 사 다른 손님이 앉아 신문을 읽고 있는 테이블의 맞은 편에 겨우 한자리를 얻어 양해를 구하는 둥 마는 둥 눈 인사를 하곤 풀썩 주저 앉았다.

며칠 전 로컬 신문의 일요판에 포함되어 들어 온 세일 품목 안내 광고문을 읽으며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과자 봉지에 손을 뻗었다. 아니 이게 웬 일? 맞은편에 앉은 남자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과자 봉지에 거의 동시에 뻗쳐 과자 한 조각을 집어 들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한입 덥석 베어 무는 것이 아닌가. 맘씨 좋은 김여사, 뭐 실수였겠지. 신문을 열심히 읽다가 보니 자기 것인 줄 알았겠지. 그저 넘어 가고, 시선을 다시 세일 품목 카탈로그로 옮긴다. 잠시 후, 커피를 한 모금 홀짝 거린 뒤, 다시 과자 한 조각을 집어 든다. 아니 이런 또 다시 앞의 그 남자, 맛있는 내 과자를 한 조각 집어 들곤 빙긋이 웃음까지 띈 표정으로 자신의 티 잔에 살짝 담근 후 한입을 베어 무는 것이 아닌가. 그래 얼마나 무안하면, 얼마나 배가 고프면, 남의 것을 말도 없이 먹을까 하며, 감사절 다음날인데 이 정도야 넘어가 줘야지 다짐한다. 더구나, 차에 마들렌 쿠키를 적셔 먹는 것이 불문과 전공자인 김 여사의 아스라한 옛 기억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에 귀엽게 봐 주기로 한 거였을 지도 모른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 버린 기억을 찾아서’의 주인공이 그 과자를 차에 적셔 먹을 때, 지난 기억들이 무의식적으로 스며 나오는 것을 경험한 그 기억 때문에…쿠키의 단맛이 김여사의 아련하지만 달달한 추억들로 시간 여행을 떠나도록 손을 잡아 끌었기 때문에.

이제 아팠던 발도 좀 나아졌고, 아직 더 사야 될 품목들도 있다는 현실로 돌아와, 마지막 남은 쿠키를 입에 물고 커피 한 모금으로 살살 녹여 먹어야지 생각하며 손을 쿠키 봉지에 뻗는 순간, 아 참 동작 빠른 이 남자 자기가 먼저 냉큼 마지막 남은 과자 조각을 집어 들어서는 반쪽으로 똑 잘라 김여사에게 넘겨 주는 것이 아닌가. 이런 몰상식한, 아니 반쯤밖에 양심이 없는 XX. 교양 있는 김여사의 입에서 거의 튀어나올 뻔한 욕을 간신히 삼키곤, 뭔가 고상하게 한 방 먹여줄 영어 구절을 머리 속에서 찾을 즈음, 이 남자 보고 있던 신문을 차곡 접어 겨드랑이에 끼곤 사람 좋은 목례와 함께 자리를 떠난다. 참, 나. 요즘은 여성에게 관심을 보이는 방법도 여러가지구나 자위하며, 주섬주섬 카탈로그를 챙겨 가방에 넣으려는 순간 가방 속에 삐죽이 얼굴을 내민 마들렌 과자 봉지가 머리 속을 하얗게 만들었다. 화가나 뚜껑이 열렸던 머리에 얼음 냉수를 확 끼얹어 김이 나게 하는 그런 기분. 아니 뭐야, 남의 과자를 먹으며, 그리도 불평을 한 거였어?”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공짜로 받은 그 사랑을 잊고, 모든 것이 원래부터 자기 것인 양, 조금이라도 손해볼까 노심초사하며 불만에 가득 찬 미세스 김의, 아니 우리네 삶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이야기였다. 추수감사절은 올 한해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주신 분들을 생각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전화 한 통이라도 드릴 따뜻한 마음을 가져야할 그런 시기이다. 우리 자녀 교육에 있어서도, 조금만 뒤로 물러나 김여사가 가방을 뒤지듯, 우리 속부터 다시 한 번 살펴 보는 것이 순서가 아닐지? 공부에 소홀한 자식을 두둔하려는 것은 전혀 아니지만, 이렇게 잘 생긴 우리 아이 올 해도 건강하게 지켜 주셨으니, 이제 정신을 가다듬어 좀 더 열심히 살아가길 바라는 기도와 함께 어깨 한 번 보듬어 안아 주는 것도 좋을 것이다. 나의 가장 가까운 이웃이 내 배우자요, 자녀들 아니겠는가? 그러니 그들이 곧 나 자신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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