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이들이 가졌으면 하는 미덕들

     이제 7월도 거의 다 지나간다. 올 해의 독립 기념일은 코로나 바이러스로부터 온전히 독립하는 달이 되겠거니 했던 기대가 점점 희미해져 간다. 백신이 남아 도는 미국에서 자신의 의지에 의해 백신을 맞지 않는 분들이 상당한 숫자를 차지하고, 집단 면역을 이룰 것으로 기대되던 70% 백신 접종자 비율에 이르기는 참으로 쉽지 않은 것으로 보여 진다.

     오늘은 교육 칼럼의 본분을 잠시 망각하고 동서양 문화 탐방의 곁길로 새어 본다. 7월이 가기 전에 7이라는 행운의 숫자(?)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본다. 먼저 7은 행운의 숫자로 알려져 왔는데, 이것은 기독교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6일간 창조하고 7일째 날에 쉰 ‘완전’을 의미하는 수이기 때문이라 한다.

     7월이라는 이름 “July”를 위해 서양에서 사용하는 ‘달’ 이름의 기원을 잠시 살펴 보자. 7월(July)과 8월(August)은 신의 이름이 아닌 로마의 정치가들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 7월은 로마의 정치인인 줄리어스 시저 (Julius Caeser)에서 따왔고, 8월은 로마의 첫번째 황제인 아우구스투스 (Augustus)를 본 따 지었다. 한편, 9월(September)과 10월(October), 11월(November)과 12월(December)은 율리우스 달력이 만들어 지기 전에 각각 일곱번째, 여덟번째, 아홉번째,와 열번째 달이었고, 로마의 숫자인 7,8,9,10에서 유래했다. 9월은 라틴어의 7이라는 의미의 septem에서 왔는데, 원래 현재 우리가 쓰는 9월(September)은 위에서 본 7월과 8월이 로마 유명인의 이름을 따 사용되기 전에 일곱번째 달이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10월은 원래 여덟이라는 의미의 octo에서 유래했고, 11월은 아홉이라는 의미의 novem에서, 12월은 열이라는 뜻의 dec에서 왔다.

     또 다른 7을 사용한 서양의 문화 유산 중에, “the seven deadly sins (죽음에 이르는 일곱 가지 죄악)”이라는 말이 있다. 여러 독자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이 개념은 기독교적인 것이며, 특히 가톨릭에서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죄 짓지 않고 잘 살기 위해 넘지 않아야 할 선을 그어 놓은 것으로, 또는 가지 말아야 할 구역을 제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기원 후 삼, 사 세기 경에 은둔자들이 정리해 놓은 여덟 가지 죄악을 6세기 후반에 교황 그레고리 일세가 처음으로 일곱 가지  죄악으로 간추려 놓은 것이 우리가 아는 “일곱 가지 죄”이다. 그 후에 가톨릭의 교리 확립에 큰 영향을 미친 토마스 아퀴나스 등에 의해 7가지 ‘주된 (capital)’ 죄악 또는 죽음에 이르는 죄악 등의 의미를 갖게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이 일곱 가지는 교만/자만 (pride), 탐욕/욕심 (greed), 시기/질투 (envy), 탐식/과음 (gluttony), 게으름/나태 (sloth), 분노/노함 (wrath)와 음욕/정욕 (lust)를 말한다. 그 중에서 가장 무서운 죄악이며 만악의 뿌리라고 생각되는 것이 교만인데, 이는 자기 자신이 남들과 다르며 자신보다 높은 존재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브루헬과 같은 화가들은 거울에 자신을 비춰 보며 황홀경에 빠져 있는 귀부인과 옆에 선 공작새로 이를 비유하기도 했다. 같은 화가가 그린 “바벨탑”의 주제처럼, 자신이 하나님과 동격의 존재가 된 것으로 착각하는 일이 바로 교만 이리라. 

     이 죄/악덕과 대척점에 있는 일곱 가지 지고의 선 (the seven heavenly virtues)은 위에 열거한 각 악의 반대 개념으로 순서대로 보면 다음과 같다: 겸손 (humility), 선행 (charity), 친절 (kindness), 절제 (temperance), 근면 (diligence), 인내 (patience)와 순결 (chastity). 자라나는 우리 자녀들이 모두 가졌으면 얼마나 좋을까 원하게 되는 미덕들이다. 이러한 미덕들은 우리 인간들이 누구나 등에 지고 사는 두 가지 조건인 온갖 욕심과 두려움에서 벗어나면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닐까? 남과의 비교에서 비롯하는 더 가지려는 욕심과 남보다 떨어질까 봐 걱정하는 두려움 말이다. 나 자신이라는 존재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더불어 사는 내 가족, 이웃, 나아가서는 원수도 나만큼 귀한 자들임을 확신하게 되면 (이들을 사랑하게 되면) 위의 미덕들은 자연스럽게 실천되는 것이리라. 내 이웃도 나만큼, 길거리의 홈리스 분들도 우리만큼, 우리가 증오하는 정치가들마저도 우리네 보통 사람만큼 귀중한 자들임을 믿는다면, 이러한 겸손과 선행과 …순결의 마음은 우리네 마음 깊은 곳에서 자연스럽게 발현 될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창조 이전에 이미 지명하여 불러 주셨고, 우리를 창조할 때 신의 이미지와 동일하게 창조했다고 한다. 단지 ‘나’만이 아닌 ‘우리’ 모두를 그리 창조했으니, 다른 사람을 어찌 존중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서양적 선악에 대한 개념은 동양에서도 통하는 것이며, 조금 경우와 종류는 다르지만, 특히 일곱 가지로 행실의 악덕을 정의해 놓은 것과 비교하면 흥미롭다. 우리 나라를 포함한 유교 문화권에 속하는 동양에서 아내가 다음과 같은 일곱 가지 악덕(?)을 행하면 결혼을 무효화할 수 있다는 즉 합당한 이혼 사유를 정의해 놓은 “칠거지악”이 있다: 1) 시부모에게 불순종, 2) 아들을 생산하지 못함, 3) 음탕함, 4) 질투함, 5) 나쁜 병이 있음, 6) 말이 많음, 그리고 7) 도둑질을 함. 이러한 죄를 범할 경우에는 이혼을 허하고 아내를 내쫒을 수 있도록 허락하는 사회적 도덕율을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이 경우에 속하더라도, 다음의 세가지 조건을 충족하면 아내를 내쫒을 수 없도록 하는 ‘삼불출’이라는 사회, 경제적 보호 장치 또한 만들어 놓은 것은 그 당시 여성에 대한 인식을 고려할 때, 상당히 민주적이랄 수 있다: 1) 내쫒아도 돌아가 의지할 곳이 없는 경우, 2) 함께 부모의 삼년상을 치른 경우와 3) 전에 가난하였으나 혼인 후 부자가 된 경우. 요즘의 사고로는 동의할 수 없는 것—아들을 생산하지 못함–도 있으나, 악법을 만드는 경우에도, 약자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를 볼 수 있으니, 이 사랑의 마음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의 마음 저 깊은 곳이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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