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과 서양 문화 2

     애독자들께서 이 신문을 펼쳐 보시는 주말의 꼭 일주일 전의 일요일은 크리스천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기념일인 부활절이었다. 부활절을 생각하며, 우리 자녀들이 크리스천이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이 날에 대해 알고 있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든다. 이유인즉슨, 필자의 지인인 어느 학부모께서 “제가 기독교인도 아니고 한국에서 늦게 미국에 이민을 오다 보니, 미국을 비롯한 서양 문화의 기본을 이루는 기독교에 대해서 잘 몰라 좀 걱정이 되네요.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쳐 줄 수가 없어서요. 요즘은 학교에서도 종교에 관한 내용들은 다루기 꺼려 하니 말입니다.”라며 한탄을 하신다. “그럼요. 서양의 철학, 예술 등에 표현된 내용들 중에 기독교적 배경을 모르면 이해하기 힘든 것이 많지요.” 필자가 맞장구를 친다.

     필자는 독자들께 기독교의 교리를 전파한다거나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에 나온 지식을 전달하는 일에 관심이 있다기 보다는 오히려 그 역사적 사건의 주변에서 일어난 인간들의 몇가지 고약한 행태를 밝히고 그 잘못들에 대해 생각하고 바르게 깨달아 보고자 하는 일에 관심이 있다. 지난 주의 부활절 관련 칼럼에 이어, 조금 더 이 문제를 다룬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며칠 전 일요일에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 가셨다. 그 때 이 천년 전 유대 땅의 백성들은 이미 예수님이 보리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로 오 천명 이상을 먹이셨고, 삼 십팔 년간 중풍으로 고생하던 자를 말씀 한 마디로 고쳤을 뿐만 아니라, 죽은 자도 살리신 기적의 소식들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당연히 그 군중들은 이 분이 그들의 모든 세상적 욕망을 채워주고, 모든 질병으로부터 자유케하며,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 줄 메시아로 확신했었을 것임이 틀림없다. 그러니 예루살렘에 개선 장군의 상징인 흰 말이 아닌 새끼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예수일지라도 “호산나”(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 “호산나”를 외치며, 그들 최고의 예우로 자신들의 겉옷을 펼쳐 가시는 길 위에 깔고, 종려 나무 가지를 흔들며 열렬히 환영했던 것이다.

     하지만, 단 며칠이 지난 그 주 금요일에 당시의 종교, 정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신성 모독을 범한 거짓 선지자로 매도하여 십자가에 달아 죽이라고 백성을 선동하고, 군중들은 며칠 전의 함성이 허공에 아직도 메아리치고 있음에도 다시 외친다: 그를 죽여라. 십자가에 매달아라 (당시의 십자가 형벌은 가장 파렴치하고 악독한 죄인을 매다는 사형 도구였다). 당시 법 집행자였던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을 채찍으로 치고, 창으로 찌르며 마침내 십자가 위에 달아 죽였다. 성경은 이 사건이 일어나기 8백여년 전에 이렇게 예언했다. 요약해 인용하면,  “그가 찔리고 상함은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이요. 그가 징계를 받고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나음을 받았다 (이사야 53:5).”

     그렇다. 기독교의 교리에 의하면, 그분의 죽음으로 우리는 죄 사함과 평화를 얻었다. 그 고마움을 상기하며, 예수님이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나신 그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는 날이 바로 부활절인 것이고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알면 기독교인들이 4월의 언저리에 부활절을 기념하며 “He is risen (예수가 죽음에서 살아 나셨다)”라고 감격스럽게 외칠 때 그 이유를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웃픈 것은 이천년 전 유대땅에 살던 그네들이나, 지금 이 신앙의 자유가 있는 미국땅에 사는 우리네의 삶의 행태가 그리 다르지 않다는 깨달음이다. 비록 성경을 읽으며 그 구세대들의 소갈머리 없음을 비난하긴 하지만, 우리 자신도 되돌아 보면, 자신의 욕망을 채워줄 그 무엇은 그리도 찬양하지만, 조금이라도 이용가치가 없어지면 그 누구라도 죽음에라도 내모는 그 몰염치함이 느껴진다. 앞으로는 예수님의 죽음에 죄송한 마음을 느끼고 염치 있게 사랑하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되는 날이 바로 부활 주일이다. 특히나 요즘은 코로나 바이러스의 창궐로 세계사의 흐름이 이제는 BC (Before Corona virus)와 AD (After the outbreak of the Disease)로 나눠질만큼 급격한 변화가 있으니 더욱 주위를 살피며, 예수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신약 성경의 요한 복음 13장을 보면,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을 갖는 장면이 기술되어 있다. “저녁을 드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 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셨다. 그리고 대야에 물을 담아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른 수건으로 닦아 주셨다.” 그 당시의 관습에 의하면, 주인이나 방문한 손님들의 발을 씻어 주는 것은 종들의 몫이었다. 발을 씻기신 이유는 같은 장에  1)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기 때문이고, 2)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관습을 깨는 파격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신가? 더욱 마음이 아팟던 장면은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기 전에 이미 제자들이 당신을 곧 배반할 것이라는 점을 알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행했다는 점이다. 수제자인 베드로는 다음 날 아침 닭이 울기 전에 3번이나 자기가 예수와 관계가 없는 사람이라고 부인을 할 터이고, 요한을 제외한 다른 제자들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모두 도망을 갈 것이며, 가롯 유다는 식사 후에 예수를 은 30전에 팔아 넘길 것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어디선가 들려 오는 “너는 그러지 않을 자신이 있느냐?”라는 물음이 필자와 여러분의 귓가에 쟁쟁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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