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해의 조기 전형 합격자 발표

     이번 주부터 다음 주 말까지는 필자와 같은 직업을 가진 칼리지 카운슬러들에게 상당히 신경이 곤두서는 시기이다. 11월 중순에 원서 접수를 조금 늦게 마감한 대학들도 상당 수 있기는 하지만, 약 6주 전인 11월 1일에 대부분의 미국 명문 대학들이 조기 전형 원서를 마감하고 이번주까지 신입생 입학 사정을 마친 뒤, 그 결과를 12월 중순에 발표하기 때문이다. 물론 12월 4일에 케이스 웨스턴 리저브의 얼리 디시전이 이미 발표되었고, 앞으로 라이스와 좐스 합킨스, 카네기 멜론, 그리고 칼텍이 각각 10일과 11일, 12일, 13일에 조기 전형 합격자를 발표하지만, 대다수의 대학들이 12월 중순인 15일 경에 발표를 한다. 즉, 뉴욕 대학과 컬럼비아, 보스턴 칼리지와 에모리 대학 등이 15일에 발표를 한다. 이어서, 예일, 유펜, 다트머스 등의 아이비 리그 대학들이 16일에, 그 다음날에는 하버드, 그리고 17일에는 코넬 대학이 각각 영예의 합격자를 알려 준다. 그리고 조금 늦게 듀크 대학과 MIT가 18일과 19일에 합격자의 명단을 발표하게 된다.

     이 기간에는 필자의 신경이 온통 전화기로 향한다. 가끔은 셀 폰을 쥔 손에 땀이 배기도 할 정도이다. 드디어, 전화벨이 울린다. 보통의 상담 예약이나 학원의 수업 등에 관한 전화 문의의 경우와 다름없는 평범한 소리이지만, 이 즈음의 벨 소리는 조금 더 날카롭고 신경을 쓰이게 만든다.

     “안녕하세요? 민 선생님.” 첫 마디가 결과를 요약해 준다. 표시 나게 달 뜬, 기쁨을 억제하기 힘든, 그 듣기에 기분 좋은 부모님 음성의 톤은 합격/불합격의 여부를 이미 다 말해 버리신 격이다. “아니, 제 아이가 XXX에 합격했어요. 선생님은 합격할 가능성이 많다 하셨지만, 사실 저는 가능성이 많지 않다고 생각하고, 합격 유보나 불합격할 경우에 어떻게 해야 되나를 걱정하고 있었거든요. 믿어 지지가 않아요.” 아들이 미국 최고 대학 중의 하나에 합격했으니 사실 가문의 영광이고 감격하실만 하니, 누가 이 부모의 진중하지 않음(?)을 탓하겠는가?

     며칠이 지나 이 부모님, 아이를 앞세우시고 필자의 사무실을 들르셨다. 이 녀석 역시 며칠이 지난 뒤인 데도,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 표정과 말투이다. “아직도 합격이 믿어지지가 않아요. 친구들 중에는 많은 아이들이 불합격했어요. 어떤 아이는 자기가 불합격했는데, 제가 합격했다고 너무 진심으로 축하를 해 주어서, 너무 마음이 찡했어요” 친구의 걱정에 자신의 기쁨도 잊는 녀석의 표정에서 필자의 입가에 흐뭇한 웃음이 배어남을 느낀다.

     게다가 부모님이 덛붙이시는 한마디는 가히 화룡점정이다, “그래, 네 친구들 중의 많은 아이들은 아직 합격 소식을 듣지 못했거나 불합격한 아이들도 많지 않니? 우린 네가 합격한 것이 너무나 자랑스럽고 기쁘지만, 우리가 좀 자제하며 다른 이들의 마음도 고려해야 하겠구나.” 아이의 어깨를 살며시 잡으시며 기분 좋은 장면을 보여 주신다. 그 장면을 보는 필자가 보기에도 좋음은 물론이지만, 이 녀석의 인생 속에서 남을 배려하는 태도를 수립하는 결정적인 초석이 되는 장면이 아니겠는가? 훌륭한 자녀를 만드는 가정 교육은 사소한 대화들에서 조금씩 실천되고 형성되는구나 하는 깨달음을 배우며, 성경의 한 구절이 떠 오른다: “[예수님이]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사도 행전: 20:35).”

     조기 전형에 불합격한 가정에 진심의 위로는 기본이다. 반대로, 합격한 학생들과 그 부모님들이 이 시기에 가장 범하기 쉬운 잘못은 자신의 기쁨을 너무 절제없이 주위에 나누는 것이다. 전화 번호가 저장되어 있지만 평소에 거의 안부도 묻지 않던 거의 모든 친구 친지들에게 전화를 걸어, “아니 우리 모모가 글쎄 이번에 미국 최고 명문대에 합격했다니까요.”로 시작되는 일방적인 대화는 그칠 줄을 모른다. 그리하여 상대방의 진심의 축하와 부러움이 조금 지겨운 지경에 이를 때까지 계속되는 자랑은 지금까지 쌓아온 인품을 한순간에 무너뜨릴 수도 있다. 이 상대방은 다른 친구와의 대화에서 이 대목을 꺼내 들고는 “아니, 도대체 합격한 것이 기쁘기는 하겠지만 좀 너무한 것 아니야? 그렇게 축하를 받고 싶으면 한 턱이라도 내면서 해야 하는 것 아냐?” 시샘만은 아닌 그럴만한 불평이 맴돈다.

     국부론을 쓴 아담 스미스가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그의 저서 ‘도덕 감정론’에서 한 말이 생각난다: 남의 기쁨은 작을수록 더 진심으로 축하할 수 있고, 남의 슬픔은 클수록 더욱 진심으로 나눌 수 있는 법이다.” 18세기 후반의 영국에서나 현재의 미국에 사는 우리 코리언 어메리칸 동포들에게나 모두 동일하게 적용되는 말이라 생각하니 혀끝이 곤두서고 머리 끝이 좀 씁쓸해 짐을 느낀다.

     한 해를 정리하는 연말에 지금까지 삶 속에서 받은 것들을 기억하고 가족과 이웃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조금이라도 나누어 주는 마음을 이 연말에 우리도 실천해 보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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