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 시, 아니면 오미크론 변이?

얼마전에 코비드 바이러스의 새로운 변이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발현해서, 그것을 ‘누’ 변이라고 부르더니, 지난 주부터는 그것을 ‘오미크론’ 변이라고 고쳐 부른다. 갑자기 왜 그런지가 궁금해 졌다. 세계 보건 기구 (WHO)가 그리스어의 알파벳을 따라 이름을 짓는 것까지는 알았으나, 왜 갑자기 영어의 N에 해당하는 ‘누’에서 그리스어에서 N과 O 사이에 있는 시(Xi)를 넘어 O에 해당하는 오미크론으로 넘어 갔는 지가 궁금해 진 것이다. 아시다시피, 그리스어의 알파벳은 24자인고 첫 자인 ‘알파’에서 시작해 마지막인 ‘오메가’로 끝난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이 세상 만사의 시작과 끝임을 말씀하시며, “나는 알파요 오메가 (요한 계시록 22:13)”라고 선언하는 데서 잘 알려져 있다. 이곳 저곳을 살펴 보니, 답은 간단하다. ‘누’의 발음이 ‘새로운’을 의미하는 영어 ‘뉴’와 비슷해서 그 의미가 잘 전달되지 않을 것을 걱정해 ‘누’를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다음은 더 명확하다. ‘시’는 코비드가 그렇지 않아도 중국 바이러스라고 지탄을 받는 상태에서, 중극의 국가 주석의 라스트 네임인 ‘시’를 연상시키도록 이름 짓는 것이 좋지 않다는 판단에서 비롯된 생략이라 한다. 텍사스주의 공화당 상원 의원인 테드 크루즈가 트윗한 것처럼, 세계 보건 기구가 중국 공산당의 심기를 거스리지 않으려 눈치를 본 다면, 어찌 그들이 정치적 영향력에서 벗어나 세계민의 건강을 위해 일함을 믿을 수 있겠는가?

“정말 믿을 놈 하나 없는 세상이구먼, 모두 힘 있는 자들의 눈치나 보고 사는 세상이니”를 되뇌이려니 시장기가 느껴 진다. 마침 매일 싸 오던 점심을 오늘 안 가져 온지라 가까운 한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혼자 된장 찌게를 주문하고 기다리노라니 옛 생각이 스친다. 삼 십년 쯤 전 시애틀로 이사 오기 전에 주위에 한국 식당이 없던 중부에서 대학원을 다녔던지라, 이곳에 와서 가장 좋았던 것 중의 하나는 가까운 거리에 한국 그로서리와 음식점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시애틀에 온 지 얼마 안되어 처음으로 방문한 한국 식당에서 출석하던 교회의 장로님 부부를 우연히 뵈었다. 두 분이 여유롭게 식사를 하시며 약속하고 만난 것도 아니고 다른 자리에서 아이와 함께 먹은 우리 가족의 식사대를 눈치채지 못하게 지불해 주신 뒤, 그저 “맛있게 많이 들어요, 저희는 먼저 나갑니다” 하시며 총총히 나가신다. 그 때만해도 가난한 유학생 부부이던 시절이라 식당에서 마음 편히 비싼 한식을 먹는 것이 그리 자유롭지 않았는데, 공짜밥을 먹고 난 뒤 얼마나 고마웠던지 아직도 기억이 새롭다. 나중에 안 이야기이지만, 그 장로님 부부께서는 자녀들이 다 동부로 공부하러 나간 뒤부터는 일주일에 두, 세 번은 거의 외식을 하신다는 거였다. 얼마나 부러웠던지. 상황의 여유가 부러웠고, 남들을 배려하시는 마음이 얼마나 존경스러웠던지.

이제는 한 주에 밥 한끼 정도는 외식을 할 수도 있는 나이와 상황이 되었는가 했는데, 식당에서 우연히 만나는 청년이나 후배들 또는 어른들에게 식사 대접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깨닫고 이유 있는 자책을 한 적이 많다. 받은 것을 다른 분에게 나마 갚는다는 의미에서라도, 다음에는 꼭 아는 어르신을 만나면 식사를 대접해야지 하며 마음을 다 잡는다. 그러나 그 다음이라는 것은 꼭 자연스레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이 팬데믹의 기간을 통해 깨닫는다.

지금은 동부에서 생활하고 있는 우리 아이들이 추수 감사절이나 크리스 마스 명절에 시애틀을 방문할 때면, 그곳에서 잘 못 먹는 한국 음식들을 자주 사 먹이려 노력한다. 그래서인지, 작년엔가 고향을 방문한 아들 녀석이 한 시애틀의 보물 이야기는 의미심장했다. 이 보물은 삶에 힘을 주는 음식들인데, 다른 어느 도시에서도 맛볼 수 없는 귀한 보물과 같은 시애틀 음식이란다. 물론 다른 도시를 방문한 경험이 많지 않은 아이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재미 있어 여기 나눈다. 먼저 필자도 좋아해 가끔 들리는 북쪽의 어느 식당에서 만드는 ‘보쌈’이란다. 자신이 사는 보스톤에서도 친구들과 보쌈을 먹어 보았지만, 이곳과는 비교가 안 되는데, 특히 ‘무우 생채 무침’이 일미라는 이야기였다. 다음 음식은 오로라 거리의 어느 ‘베트남 쌀국수’인데, 이 녀석 이곳에서 차로 10분 이내 거리에 있는 사립 고등 학교를 다닐 때도, 시니어 때는 수업 사이에 이 곳에서 점심을 먹은 적도 몇 번 있을 정도로 즐겼다 한다. 특히 애피타이저로 나오는 크림 팝은 정말 별미라고 너스레를 떤다. 다음에는 우리 식구가 모두 좋아하는 것으로 지금은 파티쉐께서 은퇴하셔서 문을 닫은 오로라의 ‘로얄 베이커리’에서 만든 ‘모카롤 케이크’이다. 이 녀석 이 것을 얼마나 좋아 하는지, “아빠 혹시 그 분을 아세요, 어디로 가셨는지? 제가 그 분을 만나서 꼭 그 케이크의 레시피를 배우고 싶어요.” 존경하는 위인에 대해 이야기할 때의 그 눈빛으로, 다른 많은 한국 음식점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이어진다.

이야기는 음식에 관한 것이지만, 속 내용은 음식을 만들고 서빙하시는 분들에 대한 고마움과 존경으로 가득 채워져 있음을 느낀다. 힘 내시라! 이렇듯 여러분의 수고로 인해 행복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즐기며 살아 가는 많은 인생들이 있으니 한인 동포 자녀들의 교육에도 큰 일을 하고 계신다는 자부심으로 조금만 더 고생하시면, 이 팬데믹도 지나 가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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