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way 교육 – 공부해야 하는 이유?

     지난 주에는 우리가 시민으로 살고 있는 미국의 국회 의사당에서 상상하지도 못한 일이 일어 났다. 한국에 있는 친구와 전화 통화를 하다가 이 일이 화제에 올라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다. 친구왈, “아니, 뭐 우린 의사당 내에서 집기를 던지고 회의장 문을 부수고 최류탄을 터트리거나 하는 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지. 여기선 의원들이 그러고, 미국에선 ‘대깨트럼프’들이 그런다는 차이는 있지만…”하며 전 같으면 대화 속에서 미국에 있는 친구를 부러워 하는 눈치가 배어 나더니 이번엔 고소하다는 어투로 약을 올린다. 아시겠지만, 요즘 한국에서는 ‘대깨문’이 머리가 깨져도 문대통령을 지지하는 세력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고 한다. 역시 우리가 사는 세상은 글로벌 시대여서인지, 모든 것이 통하고 여기에서 일어나면 저기에서도 일어 난다. 1889년 루디야드 키플링이 “East is East, and West is West, and never the twain shall meet (동은 동이고 서는 서다. 그 둘은 결코 만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은 이미 빛바랜 시구가 되고 말았다. 동과 서는 허물없이 가까워졌지만, 더 우려가 되는 것은 같은 나라 안의 옆집 사람들끼리는 대가리가 터지게 싸우고 서로를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시대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우리의 껍데기 정신을 지배하고 큰 것을 보지 못하는 좁아 터진 우리네 사고의 패러다임을 바꿔야할 때가 온 것이다. 어찌해야 할 것인가?

     한국의 젊은이들도 마찬가지이겠지만, 미국에 사는 우리의 자손들은 동에서 온 자들이나 서쪽의 정신도 동시에 갖고 있는 자들이다. 아들 녀석과 책을 한 권 사러 나갔다. 집 근처 유빌리지에 일이 있어 근처의 아마존 책방으로 향하는데, 이 녀석 잔뜩 찌푸린 표정이다. 까닭을 물어 보니, “아버지 요즘 동네 책방들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세요? 아니 책값이 좀 싸고 가깝다고 돈이 흘러 넘치게 잘 나가는 아마존에서 팔아 줄 필요가 있을까요?”라며 기다렸다는 듯이 조근조근 설명을 한다. 지난 여름, 집을 잠깐 손 볼일이 있어 근처의 홈디포엘 가려는데, 그 때 이 녀석 비슷한 말을 했었다: “그 회사의 창업자는 현 정권에게 엄청난 돈을 기부한 사람이잖아요? 우리 나라를 위해서는 다른 조그마한 스토어로 가는 것이 좋겠어요.” 이것도 서로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그리 권장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뿌리에서부터 조금씩 변화를 일으키려고 하는 “좋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라고 권유하는 태도는 우리네 어른들도 배우면 좋을 태도가 아니겠는가? 긴 이야기 줄여 간단하게 이야기 하자면, 지금 당장의 편리함이나 이익보다는 의미있고 행복한 미래를 위해 투자하자는 말이 아니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뉴욕 타임즈가 “현재 서방 세계에서 가장 대중에게 영향력이 큰 지성”이라고 몇 년 전 극찬한 조던 피터슨 교수가 펴낸 “12가지 삶의 법칙 (12 Rules for Life: An Antidote to Chaos)”중의 일곱번째 장인 “편하고 이기적인 것이 아닌, 의미있는 무언가를 추구하세요 [Pursue what is meaningful (not what is expedient)]”가 떠오른다.

     피터슨 교수의 일곱번째 챕터는 자기 계발서 답게, 우리 삶의 태도에 대해 일면 평범하고 원론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하지만, 이러한 뻔한 결론에 이르는 그의 방식은 다른 이들의 것과 차별화 된다. 피터슨 교수는 신화와 성서에 관한 그의 해박한 지식과 독특한 사유를 통해, ‘의미 있음’과 ‘편리함’의 차이를 밝힌다. 영어의 의미(Meaning)을 단순히 ‘의미’로 번역한다면, 저자의 진의를 그대로 표현하기에는 좀 부족해 보인다. 아마도 ‘(삶에서 선한) 목적을 추구하는 태도’ 정도가 좋을 것이다. ‘편리함’, 역시 ‘(근원적인 옳고 그름을 따지기 보다는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는 대로, 정치적으로 옳게 자신의 행보를 결정함으로서) 유익을 추구하는 태도’로 부연해 설명하는 것이 필자의 주장을 바르게 전달한다. 즉, 선한 목적으로 충만한 삶을 살도록 노력하라는 말이리라.  여기에서 선한 목적을 갖는다는 것은, 자신을 둘러싼 상황을 더 좋은(예를 들어 기독교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방향으로 개선하려는 마음을 자신의 사고 가치 체계의 가장 윗쪽에 두고 살아가며, 그에 따라 행동하고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피터슨 교수가 예화로 든 것은 아니지만, 전 스탠포드 대학의 심리학과 교수인 월터 미셸 교수의 ‘머쉬멜로 테스트’와 기본적으로 맥을 같이 한다 하겠다. 즉, 어린 아이들에게 머쉬멜로 한 개를 접시에 담아 주면서, 15분 후에 돌아 올 때까지 먹지 않고 참으면 하나를 더 주지만, 먹고 싶은 욕구를 견딜 수 없다면 먹어도 상관 없다고 한다. 어떤 아이들은 참지 못하고 그냥 먹어 버리는 가하면, 다른 아이들은 몸을 비틀면서라도 참고 기다려 두 개의 머쉬멜로를 받아 먹게 된다. 이 연구가 행해 진지 30년 후에, 그 참여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해 보니, 더 나은 것을 위해 기다리며 참는 태도를 보였던 아이들이 나중에 보니 인생에서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이렇게 더 좋은 미래를 위해 욕구의 충족을 미래의 시점으로 미루는 것이 아주 쉽고 단순한 의미에서 피터슨 교수의 주장과 통한다 할 수 있다.    

이렇듯,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현재의 고통과 어려움을 참고 견디라는 정말 평범하고 일견 진부하기까지 한 이야기를 쓰고 있는데, 한 학생이 잔뜩 걱정이 깃든 얼굴 표정의 어머님과 함께 필자의 사무실을 찾았다. “저는 왜 공부를 해야하고 꼭 대학엘 가야하는지 모르겠어요” 자신이 있는 건 아니지만, 꽤 단호한 목소리이다. 그러나 그 단호함은 공부나 대학 대신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없다는 대목에 이르며 힘을 잃기 시작한다. 더 나아가 게으름이나 의지 없음이 공부하기 싫음의 이유라는 것을 고백하며 고개를 숙인다. 이 대목에서 피터슨 교수의 조언과 미쉘 교수의 ‘머쉬멜로 테스트’에 대해 간략히 이야기 해 주었다. 이 녀석, 너무 진부한 이야기였지만, 다행스럽게 “올 핸 한 번 잘해 볼께요”라며 심각하고 긍정적으로 나온다. 우리 아이들이 모두 올 해는 자신의 삶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의미있는 삶을 향해 나아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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