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way 교육 – 108 번뇌로부터 36계 줄행랑?”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가 시작되는 무렵에는 작은 일에도 큰 의미를 두는 경향이 있다. 지인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비 오는 날 타고 다니는 차의 타이어가 빵꾸가 난 이야기를 나눴다. 비 맞으며 보조 타이어로 바꿔 끼우느라 고생했다며 무용담을 늘어 놓자 연초에 액땜을 한 것으로 치라는 격려의 말씀 속에 몸은 상하지 않았나 걱정하시는 마음이 가득하다. 사실 미국에 온 지 얼마 안된 젊은 시절에 탄 구형 올즈모빌에 걸맞은 반반한 타이어는 플랫 타이어가 자주 생겼지만 생겨도 거뜬히 갈아 넣고 손을 툭툭 털고 타곤 했는데, 요즘으로서는 그리 흔하게 일어나는 일도 젊지도 아니어서 이리라. 새해 아침에 까치 비슷한 (사실은 까마귀에 가까운) 검정새가 정원의 큰 아름드리 전나무 가지에 앉아 지저귀는 것을 본 아내왈, “올 해는 좋은 일이 많이 생길 모양이네” 과학자 답지 않은 해석을 하며 환한 미소를 짓는다. 피상적인 것들도 그렇지만, 정초에는 부쩍 이곳 저곳에서 의미심장한 말씀들 역시 북적거린다.

     의미가 중해 보이는 말씀 한가지를 소개한다. 필자가 출석하는 교회 목사님의 설교 말씀 중에 “대야 신학”이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영어로 설명을 듣기 전에는 ‘신학’이라는 학문이 주는 무겁고 어려운 분위기 때문인지, “대야망”을 가진 사람들의 ‘신학’ 정도로 생각하다가, 영어로 “Basin Theology”라는 번역을 듣고는 실소를 머금었다. “(세수) 대야 신학”이 아닌가? 필자의 얼굴에 스친 그 실소는 말씀이 깊어 지며 심(각한  미)소로 바뀌었다. 내용인즉슨, 성경에 등장하는 두가지 대야에 관한 비교였다. 하나는 예수님 당시 유대 나라에 파견된 로마의 총독이었던 빌라도가 사용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에서 사용한 것이란다.

     시간상 먼저 사용된 예수님의 대야를 보자. 신약 성경의 요한 복음 13장을 보면,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을 갖는 장면이 기술되어 있다. “저녁을 드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 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셨다. 그리고 대야에 물을 담아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른 수건으로 닦아 주셨다.” 그 당시의 관습에 의하면, 주인이나 방문한 손님들의 발을 씻어 주는 것은 종들의 몫이었다. 발을 씻기신 이유는 같은 장에  1)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기 때문이고, 2)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관습을 깨는 파격에 마음이 움직였다. 더욱 마음이 아팟던 장면은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기 전에 이미 제자들이 당신을 곧 배반할 것이라는 점을 알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행했다는 점이다. 수제자인 베드로는 다음 날 아침 닭이 울기 전에 3번이나 자기가 예수와 관계가 없는 사람이라고 부인을 할 터이고, 요한을 제외한 다른 제자들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모두 도망을 갈 것이며, 가롯 유다는 식사 후에 예수를 은 30에 팔아 넘길 것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어디선가 들려 오는 “너는 그럴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 필자의 귓가에 쟁쟁했다.

     빌라도의 대야. 같은 신약 성경의 구절인 마태 복음은 빌라도의 대야를 상세히 묘사해 전해 준다. 유대인의 신학자들과 그 하수인들이 가롯 유다의 밀고로 예수를 붙잡아와 재판을 요구하고 사형에 처하라고 외치며, 아니면 민란이라도 일으킬 기세이자, 빌라도는 예수가 죄가 없고 ‘옳은 사람’임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것과 또 민란이 일어나려는 것을 보고, (대야에)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고 말하였다.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책임이 없으니 여러분이 알아서 하시요.” 자신에게 닥칠 해가 예견되면 옳은 일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안위를 위해 손을 씻고 자신은 그 행위에 대해 아무런 상관/책임이 없음을 밝히는 도구로 쓰인 빌라도의 대야. 이 사건에서 영어의 숙어인, “wash my hands of something (손을 씻음으로서 그 일어난 일이 나에게는 책임이나 의무가 없다는 어구)”가 유래했다고 한다. 한국어의 관용 어구인 나는 ‘그 일에서 손을 씻었어’와 좀 다르긴 하지만 일견 통하는 말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점에서 흥미가 있다.

     새해에는 우리 어른들이나 우리의 자녀들이 자신에게 어느 정도의 해가 예견되더라도, 혹시라도 자신이 섬기는 이들의 배반이 염려되더라도, 옳은 일을 위해 또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이웃을 섬기며 발을 씻어 주는 삶의 태도를 견지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의 발을 씻겨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남의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고 하시지 않았는가?

지난 월요일 미국 의회는 연방 학자금 무료 신청서 (FAFSA: Free Application for Federal Student Aid)의 양식을 오는 2022-23학년부터 획기적으로 간편화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고, 이어서 트럼프 대통령이 서명을 했다. 이번 조치의 배경이 되는 정신은 재정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저소득 계층의 자녀들이 대학 교육을 받기 위해 필요한 재정을 보조 받기 위한 신청서의 양식이 너무 복잡해 신청을 주저하거나 못하는 계층의 학생과 부모님들을 돕기 위한 마음이다. 새로운 양식에서는 가계 소득이 6만불 이하의 가정의 경우 자산에 대한 질문이 생략되는 등 전반적으로 이전의 항목수인 108가지에서 대폭 줄어든 36가지의 항복에만 답변을 하면 되도록 바뀐다고 한다. 인생을 살아 가는데 겪는 어려움의 상징인 108번뇌로부터 36계 줄행랑을 놓는 숫자로 바뀌었다는 생각에 이르자 흐믓한 웃음이 번진다. 미국에 와서 미국의 교육에 대해 알아 가면서 가장 흡족했던 것은 명문 대학들을 포함하는 많은 대학들의 경우에 합격한 학생들이 학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재정 지원에 최선을 실질적으로 다 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30여 군데의 대학들은 합격 사정에 등록금을 낼 수 있는 여부를 아예 고려에도 넣지 않는다. 고난 받는 이웃을 섬기는 정신과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닌가? 서로가 서로에게 이런 마음을 갖고 실천하는 사회가 바로 우리 모두가 열망하는 세상 속의 천국이며 108번뇌가 사라지는 곳이 아니겠는가? 2021년이 그곳에 조금 더 가까워 지는 해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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