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way 교육 – 부모와 자녀에게 동일한 잣대를 적용하는 새 해

2021년 새해가 밝았다. 작년 2020을 시작할 때, 필자가 출석하는 교회의 목사님께서, 새 해에는 20/20 비전을 갖고 세상을 밝히 보자고 하신 것이 기억난다. 한국에서는 시력을 이야기할 때, 좌우 1.5, 1.5가 최적의 시력이라고 배웠는데, 미국에서는 20/20가 정상 시력이다. 즉, 20/20는 20피트 밖에서 정상인이 보는 것을 볼 수 있는 정상 시력이며, 가령 20/100은 정상인이 100피트에서 보는 것을 20피트에서 본다는 의미로 20분의 20을 말하는 분수이다. 여하튼, 2020년과 모양에서 맞아 떨어 지는 20/20 의 vision (시력/전망) 비유가 지난 2020년에 정말 필요한 것이었다. 산불로 대기가 흐려 앞을 잘 못 보는 때가 있었는가 하면, 팬데믹으로 인해 불확실한 세상을 바라 보는 혜안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한 해였으니 말이다.

     시력을 따지는 기준이 다른 것처럼, 한국과는 많은 것이 다른 이곳에서 산지도 참 오래되어 1.5시력보다는 20/20 비전이 조금 더 자연스럽게 다가 온다. 이제는 한국에서 산 시간보다도 미국에 와서 산 시간이 더 많아졌다는 생각에 이르자 좀 멍해지는 느낌이다. 하긴 벌써 이곳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대학을 마쳤으니 긴 세월을 이 곳 사람으로 살아 온 셈이다. 재택 근무를 해, 예년보다 일찍 12월 중순에 성탄과 새해를 지내러 집에 돌아 온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며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고향에 오니 마음이 푸근하고 좋아요. 특히 엄마, 아빠를 오랜만에 뵙게 되어 너무 좋아요.” 항상 다정다감하고 부모를 챙기는 딸 아이의 말 중에, 특히 ‘고향’이란 말이 와 닿았다. ‘그래, 이 녀석들에게는 이곳이 고향이지. 우리의 고국이 한국이듯, 이 아이들의 고국은 미국이구나’라는 별로 신기하지도 않은 발견이 새롭게 느껴 진다.

     이러한 깨달음이 많은 생각들로 가지를 치고 뻗어 나간다. 혹시나 아이들을 양육하는 중에 이 아이들을 우리 부모들이 경험해 온 순 한국식 사고방식으로 가르친 것이나 아닌가 하는 것에 생각이 미친다. 우리네 사정에 따라 편한대로, 부모에게 유리한 것이 미국식이면 그것을 강요하고, 한국식이 편한 점은 그것을 대입하는 식으로 말이다. 반대로, 많은 분들이 이 곳에서 태어나 한국 부모들의 가정 교육을 받은 자녀들이 보여 주는 ‘이중의 잣대 (double standard)에 대해 불만을 쏟아 놓으신다. 가령, 부모가 집에 돌아와 카우치에 누워있는 아이에게 “부모를 보면 벌떡 일어나 인사를 해야지”라며 혼을 낼라치면, 다른 미국 아이들은 누워서 그저 “하이, 맘”해도 아무말 안한다며 야속해 한다. 반대로, 대학에 진학할 때, 부모가 등록금을 안 대주면, “한국에서는 부모가 자녀의 학비를 다 책임져 준다는데”하며 불만을 호소한다는 식이다. 바로 이처럼, 우리도 우리 편한식으로 아이들을 가르쳐 오지나 않았는지 걱정이 되어 좁쌀같은 소름이 돋는다.

     대부분 한인 부모님들의 경우, 아이를 꾸중하고 혼내는 과정에서 우리네 부모의 가장 기본적인 마음은 ‘우리 아이가 잘 되도록 돕는, 또는 정신을 차리고 제 자리를 찾도록 일깨우는 과정에서 자녀를 교훈하고 있다’고 의심없이 믿는다. 혹시 기독교인이시라면,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에베소서 6장4절)”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인내를 가지고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어떤 분의 해석처럼 “교양과 훈계”가 ‘부모 자신의 행동(교양)과 일상에서 사용하는 말(훈계)’로서 자녀에게 보여 주는 산 교육 방법이라면, 우리네 부모들의 자녀 교육은 많은 경우에 잘못되어 있다. 즉, 자신이 안하고 못하는 일을 자녀에게만 억지로 요구하는 식이 된다. 그러니, 자녀는 이러한 부모의 진심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따르기 보다는 이러한 진심을 왜곡하고 부모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인식하고 기억한다는 점이다.

     정신 건강 의학 전문가들의 견해에 필자의 예화를 가미해 본다: 부모가 성적을 잘 못 받아 온 아이를 타이르는 장면에서, “너 이렇게 공부를 안 해서 어떻게 네가 원하는 대학을 가겠니?”라고 충고를 했다고 하자. 만일 평소에 이 자녀와 부모님의 관계가 충고를 간섭이 아닌 좋은 말로 받아들일 만큼 친밀한 관계의 부모였다면, 부모님의 진심(내 아이를 좋은 길로 인도하려는)을 그대로 받아 들이고 그렇게 기억을 할 것이다. 대학에 진학한 뒤, 방학에 집에 오면, “엄마, 고마워요. 항상 고비 때마다 잘 격려하고 바른 길로 인도해 주어서요.”라며 눈물이 글썽할 것이다. 고려대 영문과 출신으로 가수로 활동하다 지금은 미국의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는 이소은의 아버지 이규천씨가 이 년 전에 펴낸 책, ‘나는 천천히 아빠가 되었다’의 한 구절이 귀에 울린다. 딸이 힘들게 들어간 로스쿨의 첫 시험에서 꼴찌를 하고 펑펑 울 때, 아버지가 보낸 손 편지, “잊어버려. 아빠는 너의 전부를 사랑하지 네가 잘할 때만 사랑하는 게 아니야.” 어떤 딸이 힘을 내어 재기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와는 달리, 감정이 상한 상태에서 혼을 내시는 부모에게 기분이 상한 자녀는 그 말을 “이따위로 공부를 안하고 매일 게임만 해서 커뮤니티 칼리지라도 갈 수 있겠어”라고 해석을 하고, 부정적인 의미(매번 부모의 의지와 뜻만 아이에게 부담시키는)로 기억 체계 속에 보관한다. 같은 말이나 행동도 그것을 보거나 듣는 사람의 정서에 따라 서로 다르게 인지된다는 것이다. 즉, 그 당시의 아이의 정서적 반응에 따라 기억이 나기도하고 안 나기도 하는가 하면, 일부러 잊기도 하고 무의식 속에 묻혀지기도 한다. 우리 아이들에게 교양과 훈계를 하기 위해 내 자신부터 ‘동일 잣대 (Common Standard)’를 사용해야 하니, 좋은 부모되기가 쉬운 것이 아님을 새삼스레 깨닫는 새해 아침이다. 부족한 필자의 칼럼을 읽어 주시고 성원해 주시는 독자들께 감사를 드리고 올 한해는 더욱 더 몸 건강하시고 마음 평안하시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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