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way 교육 – COVID-19이 가져온 변화 2: 어떻게 교육에 대응할까?

요즘 각종 미디어에서 다루는 COVID-19의 영향은 실로 다양하다. 미디어에 나오는 각 분야 전문가들의 현 상황에 대한 판단과 그에 기반한 예측은 각 분야에 따라 다르지만 그 저변에 흐르는 맥은 거의 동일하다. 한마디로 이 위기의 시기를 어떻게 대처해 나가느냐에 따라 이 재난이 지나간 후에 큰 결실을 맺을 수도 있는가 하면, 일어설 힘도 없이 무너지는 상태에 처할 수도 있다는 진단이다. 지난 주에는 이 질병의 창궐이 초래한 경제 분야의 변화들에 대해서  알아 보았고, 이번 주부터는 교육의 분야에서 어떻게 이 재난에 대처해야 보다 나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는 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이 바이러스의 창궐 이전과 이후의 중간 지점에 살고 있는 현 시대를,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삶에 바람직할, 또는 그 새 삶 속에서 생존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생각되는 어떤 새 기준들을 세워 나가는 과정으로 파악한다. 이 과정에서 바람직한 태도는 이 새로운 삶의 기준/방식을 위한 필요를 먼저 통열하게 인식하고, 그것을 엄숙하게 세워 나가는 자세이다. 막연히 곧 바이러스의 백신과 치료법이 마련되어 곧 예전과 같은 삶으로 돌아가겠지라는 기대에 기반해 잠시만을 모면하면 되겠다는 마음보다는 이 경계의 시대에 이르게 된 우리 자신을 돌아 보고 앞으로 우리와 우리 자녀들이 살 세상을 보다 예측 가능한 세상으로 만들어 나가겠다는 의지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필자의 몇몇 앞 선 칼럼들에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가 지금 당면한 경계의 시대/공간이란 여러가지 다른 분야에서 조금씩 다른 의미로 사용되지만, 일관된 맥을 갖는다. 건축에서의 경계적 공간은 대청 마루나 문지방처럼 실내와 실외를 경계 짓는 공간을, 지정학적으로는 남북한 사이의 비무장 지대처럼 나라와 이데올로기의 차이를 경계 짓기도 한다. 인류학적으로는 성인의식처럼 미성숙한 아이로부터 성인으로 바뀌는 의식을 의미하는가 하면, 종교적으로는 신으로부터 주어진 어떤 고통이나 훈련 기간을 통해 자신의 직전 상태에 대한 깨달음을 얻게 되는 기간이나 공간을 말할 수도 있다. 즉, 이 공간이나 시간 속에 겪는 경험, 시험, 의식 등을 통해 이전과는 전적으로 다른 세계관 또는 세계에 대한 이해를 갖게 되는 그런 두 시대와 공간 사이에 낀 기간이나 공간을 의미한다.  

     이러한 시기나 장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러한 경계 구역을 지금 지나고 있음을 깨닫는 인식이다. 내가 지금 어떤 상황 속에 있으며, 왜 지금 이런 일을 겪고 있는 지에 대해 통찰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잠깐만이라도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인간의 속성상, 이러한 시간이나 경험이 없이는 자신의 삶을 돌아 보지 못하고 고마움을 모르고 스스로 만족하며 생각없이 하던 일을 계속하는 것이 보통이다. 성경적으로 말하면, 노아의 홍수 이전에 만연해 있던 죄악에 물들었던 그 당시 사람들은 홍수가 닥쳐 소수를 제외하고 모두 죽게 되기 전에는 그 만연한 죄악을 죄악으로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경제적, 신체적, 사회적인 고통을 겪으며, 이것에 불평을 퍼붓기 보다는 이 시간을 통해 우리를 돌아 보며 귀중한 것들을 감사하지 못하며 지냈던 파렴치함에 대해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갖는 것이 어떨까? 이러한 경계적 시간이나 공간을 갖게 되는 절호의 기회는 보통 외부로 부터 주어진 고통이나 수고에서 시발되는데, 이 공간 또는 시간을 지나 도달할 다른 시간이나 공간이 이전의 것보다 더 바람직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위해서 말한 이 상태에 대한 인식과 사색, 그리고 실천이 필요하다.

     이것을 위해, 먼저 생각할 점은 “왜 우리는 이러한 문턱에 서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많은 경우에 그것은 우리가 그 동안 쌓아 온 잘못된 또는 너무 잘된 일들이 생각없이 축적되어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이 넘치는 시점에 있음을 의미한다.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인류의 일탈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서, 심판이나 정죄를 하시는 지점이다. 보통 ‘시험’이라고 부르는 이 고통의 기간은 대개 인류의 회개와 깨달음으로 귀착되고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지점이다. 집단이나 개인이 작으나 큰 이 경계적 시간을 맞을 수 있다. 이 물음에 대한 독자 여러분 자신의 답은 무엇인가? 내 자신의 의지나 행동과는 상관없이 이 몹쓸 바이러스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 치부하면 마음의 부담은 없지만, 이 재난을 계기로 우리 자신을 한 번 돌아 보는 것은 분명 유익할 것이다.

     둘째, 이 문턱을 넘으면 무엇이 오는가? 전적으로 이 문턱에 서게 된 이유들을 또는 이 문턱의 상황을 어떻게 인식하고 깨달으며 행동하느냐에 달려 있다. 돈에 지나치게 마음이 팔려 주위 사람들의 곤경과 슬픔을 무시했다면, 그것을 깨닫고 그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삶으로 바꾸는 계기를 삼아 이 문턱을 지나면 행복한 (또는 지금의 불확실함을 벗어난 확실한) 상태로 들어 서게 될 것이다. 그 깨달음과 실행의 정도에 따라 이후의 행복의 크기나 지속되는 기간이 다를 수 있을 것이고, 또 다시 인생의 어떤 지점에서 또 다른 크고 작은 문턱 위에 서게 될 때 그 정도가 결정될 것이다.

     이 문턱에 있음을 깨닫고 그것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방식은 다양할 것이다. 먼저, 정신적인 각성을 초래할 수도 있다. 건축에서의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의 구분처럼, 일견 추상적인 “Less is More”에서 “Less is a Bore”로, 또는 그 반대 방향의 철학적 미학적인 각성의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최소의 것이 더 많은 것을 표현한다”는 말은 초기의 고층 건물들처럼 네모 반듯하고 거의 장식이 없는 유리/금속 기둥 건물들이 안고 있는 추상적이고 단순한 아름다움을 숭상하는 정신을 표현한다. 반면에, “최소의 표현은 재미가 없다”는 표어는 후기 모더니즘 건축가들이 추구한 건물의 내용과 재미를 드러낸다. 즉, 이 둘 사이에서 우리네 삶의 전반을 관통하는 정신이 변화되는 지점을 볼 수 있다.

교육의 분야에 있어서 이 재난의 시대의 앞뒤를 구분 짓고 바람직한 결말을 얻는 것이 이러한 정신적인 변화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우리 자녀들이 이 시기를 어떻게 지내느냐에 따라 맞게 될 이후의 세계는 경제학자들의 생각처럼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심각한 삶의 양극화에 귀결될 지도 모른다. 다음주까지 독자 여러분들도 한 번 생각해 보시면 어떠하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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