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 감사절에

11월은 제법 쌀쌀한 기온으로 몸이 움츠려 들고 한 해의 마무리에 대한 부담으로 비교적 마음의
여유가 없는 때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추수감사절을 맞아 타 지역으로 공부하러 떠났던,
가깝거나 먼 곳으로 직장 때문에 집을 나갔던 자녀들을 비롯한 가족들을 다시 만나는 기쁨이
있는 시간이어서 따뜻하다. 여기에다 추수감사절의 원래 의미인 감사의 마음으로 자신과
주위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니 또한 훈훈하다.

이런 마음을 모아 이번호에는 계속되어 온 대입 에세이 시리즈에서 잠시 벗어나 추수감사절
무렵에 지면이 허락하면 보내드리곤 하는 필자의 애창 칼럼을 가다듬어 게재한다.

올 해는 직장이 바빠 집에 오지 못한 아이들 때문에 남편과 집에서 점심을 간단히 때운,
교양이 넘치고 알뜰한 우리의 미세스 김이, 조금은 이른듯 하지만, 블랙 플라이 데이 세일을
구실삼아 크리스 마스 샤핑에 나섰다. 매년 실제 경기와 상관없이 가정을 꾸려나가는 엄마로서
느끼는 것이지만, 올 해 역시 경기가 피부에 느껴질만큼 좋지만은 않은 관계로 선물을 할 분들의
리스트를 최소한으로 줄이느라 고심을 했다. 부모님등을 비롯해 아주 소수의 분들로 대상은
좁혀졌지만, 이분들의 마음이나마 따스하게 데워드렸으면 하는 소망으로 정성어린 선물을
사느라 열심히 발품을 팔다보니 시장하고 목이 말랐다. 마음 한구석에는 어휴 커피 한 잔값에
조금만 더 붙이면, 리스트에서 애석하게 빠진 먼 촌수의 이모님께 마음이 담긴 선물을 하나
해드릴 수 있을텐데 하는 주저함도 있었으나 조그만 과자 한 봉지와 커피를 한 잔 사 마시며
좀 쉬기로 작정을 했다.

장시간의 쇼핑에 지루해진 남편이 가까운 서점에 들어간 사이 몰안의 스타 벅스 커피점엘
들렀다. 긴 줄에서 얼마를 기다린 후 겨우 아메리카노 커피 한 잔과 마들렌 쿠키 몇 조각을
사 다른 손님이 앉아 신문을 읽고 있는 테이블의 맞은 편에 겨우 한자리를 얻어 양해를 구하는 둥
마는둥 눈 인사를 하곤 풀석 주저 앉았다.

며칠 전 로칼 신문의 일요판에 포함되어 들어 온 세일 품목 안내 광고문을 읽으며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과자 봉지에 손을 뻗었다. 아니 이게 웬 일? 맞은편에 앉은 남자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과자 봉지에 거의 동시에 뻗쳐 과자 한 조각을 집어 들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한입 덥썩 베어 무는 것이 아닌가. 맘씨 좋은 김여사, 뭐 실수였겠지. 신문을 열심히
읽다가 보니 자기 것인줄 알았겠지. 그저 넘어 가고, 시선을 다시 세일품 카탈로그로 옮긴다.
잠시후, 커피를 한 모금 홀짝 거린뒤, 다시 과자 한조각을 집어든다. 아니 이런 또 다시 앞의
그 남자, 맛있는 내 과자를 한조각 집어들곤 빙긋이 웃음까지 띈 표정으로 자신의 티 잔에 살짝
담근 후 한입을 베어무는 것이 아닌가.

그래 얼마나 무안하면, 얼마나 배가 고프면, 남의 것을 말도 없이 먹을까하며, 감사절
다음날인데 이 정도야 넘어가줘야지 다짐한다. 더구나, 차에 마들렌 쿠키를 적셔 먹는 것이
불문과 전공자인 김 여사의 옛 기억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에 귀엽게 봐 주기로 한 거였을 지도
모른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 버린 기억을 찾아서’의 주인공이 그 과자를 차에 적셔 먹을 때,
지난 기억들이 무의식적으로 스며나오는 것을 경험한 그 기억 때문에…쿠키의 단맛이
김여사의 아련하지만 달달한 추억들로 시간 여행을 떠나도록 손을 잡아 끌었기 때문에.

이제 아팠던 발도 좀 나아졌고, 아직 더 사야될 품목들도 있다는 현실로 돌아와,
마지막 남은 쿠키를 입에 물고 커피 한 모금으로 살살 녹여 먹어야지 생각하며 손을
쿠키봉지에 뻗는 순간, 아 참 동작 빠른 이 남자 자기가 먼저 냉큼 마지막 남은 과자 조각을
집어들어선 반쪽으로 똑 잘라 김여사에게 넘겨 주는 것이 아닌가. 이런 몰상식한,
아니 반쯤밖에 양심이 없는 XX. 교양있는 김여사의 입에서 거의 튀어나올 뻔한 욕을 간신히
삼키곤, 뭔가 고상하게 한 방 먹여줄 영어 구절을 머리속에서 찾을 즈음, 이 남자 보고 있던
신문을 차곡 접어 겨드랑이에 끼곤 사람좋은 목례와 함께 자리를 떠난다. 참, 나. 요즘은
여성에게 관심을 보이는 방법도 여러가지구나 자위하며, 주섬주섬 카탈로그를 챙겨 가방에
넣으려는 순간 가방 속에 삐죽이 얼굴을 내민 마들렌 과자 봉지가 머리속을 하얗게 만들었다.

화가나 뚜껑이 열렸던 머리에 얼음 냉수를 확 끼얹어 김이나게하는 그런 기분.
아니 뭐야, 남의 과자를 먹으며, 그리도 불평을 한거였어?

우리 교회 목사님이 몇 년전 추수감사절 예배에서 말씀하신 예화를 필자의 상상력을
가미하여 각색해 옮겨 보았다.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공짜로
받은 그 사랑을 잊고, 모든 것이 원래부터 자기것인양, 조금이라도 손해볼까 노심초사하며
불만에 가득찬 우리네 삶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이야기였다. 추수감사절은 올 한해
“은혜”를 베풀어 주신 분들을 생각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전화 한 통이라도 드릴 따뜻한
마음을 가져야할 그런 시기이다.

우리 자녀 교육에 있어서도, 조금만 뒤로 물러나 김여사가 가방을 뒤지듯,
우리 속부터 다시 한 번 살펴 보는 것이 순서가 아닐지. 공부에 소홀한 자식을 두둔하려는
것은 전혀 아니지만, 이렇게 잘 생긴 우리 아이 올 해도 건강하게 지켜 주셨으니,
이제 정신을 가다듬어 좀 더 열심히 살아가길 바라는 기도와 함께 어깨한번 보듬어
안아 주는 것도 좋지 않을실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