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티미트 게임

지난 주말 연휴가 시작되자, 대학을 마치고 동부에 직장을 잡아 떠나기 전 고향에서 시간을 보내려 온 아들 녀석이 진득하게 집에 있으며 쉬기나할 것이지 집을 떠나 삼사일 밖에서 지내겠다고 텐트를 챙긴다. 멀리가는 것은 아니고 지척에 있는 레드몬드의 60에이커 파크에서 열리는 팟라치 얼티미트 프리스비의 전국 대회에 참가하려 한단다.

어느 계절을 막론하고 성행하는 운동이지만, 특히 여름에 주변의 학교 운동장이나 파크를 지나가시다가 보면 웬 플라스틱 접시 같은 것을 던지고 받으며 남녀가 어울려 열심히 땀을 흘리며 뛰어다니는 게임을 보신 적이 있으실 것이다. 이 스포츠를 얼티미트 프리스비 게임이라고 부르는데, 전국적으로 따져도 특히 시애틀에서 가장 성행하는 스포츠 중의 하나이며, 그래서인지 시애틀 다운타운의 사립 학교인 노스웨스트 스쿨은 이 운동으로 매년 워싱턴 주나 전국 대회에서 빼어난 성적을 올리는 것으로 유명할 정도이다. 나아가 명문 대학들에서도 점점 이 운동을 하는 이들이 늘어나 미네소타의 명문 리버럴 아츠 칼리지인 칼튼은 이 게임의 마나아들이 모이는 대학으로 유명하며, 올 해는 하버드 대학 팀이 전국 대회에서 미네소타 대학팀에 아깝게 져 준우승을 차지하는 등 동부의 명문 대학들이 열을 올리는 스포츠로 전국에서 오백만명 이상이 즐기는 인기 게임으로 자라나고 있다.

독립 기념일 오후에 아들 녀석이 시합에 참가하고 있는60 에이커 파크를 찾았다. 새마미시 리버 트레일에 가깝고 우든빌과 마주한 레드몬드에 있는 이 이름처럼 광대한 운동장/공원에는 수많은 인파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미국의 전역에서 온 얼티미트 게임의 마니아들은 물론이고, 한국을 비롯한 (태극기를 흔드는 선수를 보고 짐작컨데) 세계 각국에서 온 90여개 팀의 외국인 선수들까지 모두 천여명이 어우러져 게임을 즐기는 모습은 수십개의 운동장 주변에 쳐진 텐트와 어우러져 축제 분위기를 펼쳐 보이고 있었다. 여기 저기 펼쳐진 형형색색의 텐트들은 어림잡아도 수백개에 달했고, 게임이 없는 때에 이곳 저곳에 몰려 앉아 시끌벅쩍 이야기를 나누는 젊음의 웃음 소리들, 날씨가 좀 흐리긴 하지만 잔디밭 위에서 프리스비를 쫒아 전력으로 질주하느라 땀범벅이 된 참가자들, 더위로 웃통을 벗어제친 채 온힘을 다하는 남자 선수들과 비키니 차림으로 달리는 여자 선수들, 이 모든 광경은 청춘을 예찬하는 시인들의 싯귀보다도 훨씬 청춘스러운 모습이었다.

집에 돌아 오는 찻 속에서 아들 녀석과 우리에게는 그리 익숙하지 않은 얼티미트 프리스비 선수 또는 애호가들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운동에 열중하느라 휴대 전화나 지갑 등등의 소지품들을 잃어 버린 아이들이 꽤 있었어요. 걱정을 했는데, 분실물 보관소엘 가니까 다 있는 거예요. 정말 기분 좋은 그 느낌 아시죠?” “프리스비하는 아이들을 만나면, 그냥 마음이 진심 통하고 좋은 친구라는 느낌이 확 오는 것 있죠.” 자신이 좋아하는 운동과 같은 운동을 하는 동료들의 정직함과 순수함에 경의를 표하는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동감을 표하며, ‘프리스비’는 ‘프리 스피릿’을 가진 사람들의 운동인 것같다며 아재 개그로 진심의 맞장구를 쳐주자 이 녀석 한참 들뜬 음성으로 얼티미트 프리스비에 대한 예찬론을 장황하게 펼친다. 이 게임은 초기에는 파이나 케이크의 바닥에 까는 양철판을 던지며 노는 놀이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몇몇 파이오니어들의 노력으로 지금 사용되는 플라스틱 접시로 개선되었고 앰허스트 등을 비롯한 대학들에 다니던 초창기 멤버들이 규칙을 만들고 팀을 만들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프리스비라는 이름은 초기에 이 플라스틱 접시 모양을 개선해 팔던 한 장남감 회사가 자사 제품에 부친 고유 명사인데 이것이 자연스레 이 운동 기구를 통칭하는 이름이 되었다 한다 (마치 클리넥스 티슈처럼). 그러므로 이 게임의 정식 이름은 프리스비 게임이 아니라 얼티미트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하단다.

“그런데 이 게임의 이름 ‘얼티미트 (Ultimate)’는 뭘 뜻하는 거니?”라는 물음에 아들 녀석은 기다렸다는듯이, 신이 나서 대답을 한다. “그걸 설명드리기 전에, 우선, 이 얼티미트 게임에는 심판이 없어요. 그걸 아셨어요?” 남자들의 대화에 별 흥미가 없어하던 딸 아이와 아내가 놀란듯이 정색을 하고 묻는다. “아니 심판이 없는 게임이 어디 있어, 그럼 어떻게 게임이 잘 진행될 수가 있나?” 고교와 대학에서 라크로스를 했던 딸 아이의 아니 우리 모두의 공통된 의문이었다. 아들 녀석, 신이 나서는, “그러니까 이 게임을 얼티미트라고 부르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신사의 게임, 누가 규율을 억제하지 않아도 선수들 개개인이 잘못(파울)을 범했다면 인정하고 공격권을 내주는, 그야말로 우리 인류가 가질 수 있는 최종(얼티미트)의 게임이라는 말이지요” 하며 자랑을 한다.

우리 자녀들이 대학을 가고 시간이 지나면 졸업을 하고 사회에 진출할 것이다. 이 아이들이 얼티미트 게임을 하듯이 사회 생활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바램이 너무 순진한, 아니 허망한 소망일까? 아니 그렇지만은 않으리라. 우리 가정에서 부터 이런 게임을 하듯 서로를 존중하고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회개하는 버릇을 키워 나간다면, 왜 이런 사회가 우리 아이들의 세대에 도래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