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가는 이유 2

     지난 주부터 “대학 교육의 목적은 무엇일까?”를 주제로 시리즈를 진행하고 있다. 쉽게 말해, “왜 우리 아이들은 대학엘 가려는 것일까, 또는 우리 부모들은 왜 자녀들을 대학에 보내려 하는 것일까?”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보자는 것이다. 이 시리즈의 주제에 대한 단초는 대학 교육 연감이라는 교육 전문 잡지에서 읽은 댄 베레트의 글, “대학 공부의 목적이 바뀐 날: 1967년 2월 28일부터 대학에 가는 목적은 직장을 얻는 것이 되었다”였다.

     이번 칼럼에서는 베레트의 글 속에 잘 정리된 부분, 즉 미국 사람들은 과연 미국 대학의 목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며, 그러한 생각들은 건국 이래 어떻게 변화되어 왔을까에 대해 소개하도록 한다. 그 글의 부제가 말하는 것처럼, 베레트는 1967년 2월 말에 행해진 로날드 레이건의 의회 연설이 그 동안 미국 시민들의 의식속에 소수의견으로 잠복해 있던 생각–대학 또는 대학 공부의 목적은 교양이나 학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실용적인 것이라는 점–을 대변해 냈고 이 시점부터 그러한 견해가 보다 우월한 위치를 점하는 계기 또는 시발점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 해에 캘리포니아의 주지사에 취임한 레이건은 당시 캘리포니아의 재정이 상당히 어려운 상황이기에 모든 분야에서 허리를 졸라매야 한다며, 교육 분야에 대해서도 한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당시 UC Davis에서 개설하고 있던 4학점짜리 강좌인 “데모를 조직하는 방법”을 예로 들며, 납세자들의 세금이 ‘지적 호기심’ 또는 지적인 사치만을 충족시키는 즉 학문을 위한 학문의 영역을 조장하기 위한 일에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말은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또는 교양을 위한) 학문이 나쁜 것은 물론 아니지만, 납세자들이 이런 분야에까지 세금을 사용할 필요는 없으며, 대학은 직업과 관련된 실질 교육에 치중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미 건국 이래로 미국 대학 교육의 목적에 대한 미국민들의 견해가 첨예하게 대립해 온 것은 사실이다. 그 당시까지는 대학 교육의 목적이 ‘지적 발달을 위한 도구요, 융통성을 기르는 것이며, 그 가치가 금방 드러나지는 않더라도 무슨 공부이든지 지식과 기술을 광범위하게 습득하는 것’이 보다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진 생각이었다. 그러나 레이건의 연설이 촉발시킨 실용적인 목적은 당장은 아니더라도, 이 논쟁의 전세를 역전시키게 되었다. 즉, 1970년대 초의 한 조사에 의하면 당시 대학 신입생의 3/4은 대학 교육의 목적이 “인생의 의미았는 철학, 즉 교양 학문을 발전시키고 교육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는 상황은 그와 정 반대이다.

     지난해 오바마 대통령은 “사람들은 미술사 학위보다는 보다 실질적인 기술을 가지면 더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라고 했다가 미술사 학계의 거친 비난을 받고 용서를 빈 적이 있는데, 이것을 두고 플로리다의 공화계 상원의원인 마르코 루비오는 “이런 불쌍한 대통령의 사과라니!!! 우리는 직장을 얻을 수 있는 공부가 필요하잖아”라고 트위터 메세지를 날릴 지경에 이르렀다. 여론에 민감한 정치가들의 초당적이고 얍쌉한 입을 바라 보면 사람들의 의중이 읽힌다. 즉 완전한 전세 역전이 아닌가?

     건국초에도 이러한 생각의 차이는 있었지만 우세한 쪽은 지금과는 달랐다. 1779년에 토마스 제퍼슨은 폭 넓게 교육받은 대중들이 민주주의를 강하게 한다고 썼다: “재능과 덕을 가진 사람은 가치있는 교양 교육으로 양성되며, 이 사람들은 동료 시민의 권리와 자유의 성스러운 보고를 지킬 수 있게 되며 (이러한 사람들은 독재자들에게 쉽게 휘둘리지 않는다).” 이에 반해, 실용 학문인 경영학으로 유명한 펜실베니아 대학을 설립한 벤자민 프랭클린은 교양 교육을 조롱하면서, 하버드의 학생들은 “고작 배운다는 것이 자신을 곱게 치장하고 어딜 갈 때 젊잖게 들어가는 것 정도이다. (그들이 졸업할 때 쯤에는) 여전히 꽉막힌 성깔에 자만에 가득찬 그런 사람에 머문다.”

     한세기 후에도 역시 이 대결 구도는 여전하다. 부커 워싱턴은 “지식은 실생활과 연결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막 자유를 얻은 흑인들이 자신들의 경제적 운명을 결정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어야 한다).” 이에 반해,  듀 보아는 “행복의 추구는 돈만을 추구하는 것으로  좁혀질 수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 교육의 마지막 결과물은 심리학자가 아니고 그렇다고 벽돌공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다.”라고 설파했다.

    이런 상반된 의견에도 불구하고 이때까지의 승자는 여전히 대학이 인간의 인간됨을 교육하는 것이라는 의견이 다수였다. 1947년에 트루만 대통령은 대학들이 돈을 벌거나 직장을 얻기 위한 방법이 아닌, “삶의 모든 분야”에서 민주주의를 실현하도록 애써야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비해 반세기 후인2013년에 노스 캐롤라이나의 주지사인 펫 맥크로리는 “대학에서 성별학을 전공하려면 사립 학교에 가라. 난 직장을 얻을 수 있는 과목이 아니라면 주의 재정을 지원할 의사가 전혀 없다.” 작금의 미국인들이 대학의 목적에 대해 갖고 있는 보편적인 생각인 듯한데,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