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여름부터였던 것 같다. (1)

작년 여름부터였던 같다.

아침에 일어나 창밖을 바라보는데 눈앞의 풍경이 희미하게 보이더니 눈을 비비고 눈을 떴다 감았다 하기를 서너번째, 눈이 점차적으로 나아지는듯하였다.

이후로도 왼쪽 눈에 무엇이 끼인듯한 느낌이 자주 들었으나 잠시후면 괜찮아지곤했고 안경을 끼면 지장이 없어서 이때까지 그냥 지내온듯 하였다.

그런데 두달전부터는 머리의 통증이 심해지면서 아무리 두통약을 먹어도 머리의 통증이 사라지질 않고 눈의 시력이 나빠진듯 안경을 껴도 가끔씩 눈앞에 뿌옇게 안개가 끼인것같은 느낌이 들곤 하였는데 그래도 안경을 끼면 보이니까 세상이 그렇게 보이는줄 알고 그냥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내가 어릴때부터 안경을 써왔기에 밝고 환하게 보인다는 뜻이 어떤뜻인지 설명을 하기가 쉽지가 않았다.

우리 형제 모두가 안경을 쓰니 아마도 우리형제들 눈이 유전탓으로 시력이 나쁜듯 하다고 생각을 하면서 눈이 안보여도 그다지 불평이 없었었다.

머리통증이 심해지면서 두통약을 먹기를시작하였는데 하루에 정해진 시간대로 몇번을 먹어도 머리의 통증과 눈의 통증이 나아지질 않자

아하! 내가 왜이러고 있지?

병원엘 가봐야지!

11 말이라 병원의사하고 약속하는것이 하늘의 별따기 였지만 같은병원에 있는 친구의 도움으로 그나마 어려운 안과의사하고 면담을 하게 되었다.

두통의 시작이 눈때문이라는것을 알고는 정밀 눈검사를 시작한지 두시간여만에 담당의사가 보험관계를 묻는다.

보험처리가 되지않으면 엄청돈이 많이 나올터인데라며

마침 금년에는 내가 여러가지로 사고도 많이나고 몸이 아픈곳도 많았기에 병원비는 디덕터블을 훨씬 넘어서있기에 디덕터블이 넘어서는 금액은 치료부위에 따라 조금씩 다른 커버가 되었었다.

물론 100% 커버는 안되더라도 ….

안과의사의 소견은 왼쪽눈은 백내장이 거의 덮여있어서 시력이 나오질 않고 오른쪽 눈은 망막에 이상이 있어서 그냥놓아두면 실명할 상태이니 급한눈이 오른쪽 눈이란다.

그런데 몸의 건강상태를 체크해보자며 여러가지 검사를 해보더니 내나이에 많이 있을 성인병이 없으니 두눈다 이틀사이로 수술을 하는게 좋다고 한다.

보통 눈수술은 한꺼번에 두쪽 않하는데 내눈의 상태가 그리 오래둘수있는 형편이 아니고 보험관계도 2016년을 넘어가면 커버리지가 달라지니 여러가지 이유로 수술날짜를 잡았다.

수술을 앞두고는 걱정이 들기도 했다.

큰언니가 3년전 대장암수술후 회복단계에서 별안간 눈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거의 모든사물을 희미하게 보이면서 거의 매달 병원에가서 눈에 주사를 맞고있는데 도통 시력이 좋아지질 않아서 자기차의 운전대를 놓아버렸었다.

마음이 아픈것은 대학교수였던 형부가 사고로 뇌수술후 치매가 발전하여서 언니의 도움없이는 잠시라도 혼자 놓아둘수없는상태이기 때문에 언니의 실명은 더욱 힘든일이였다.

형부는 성격이 온화하셔서 치매가 걸리셨는데에도 그다지 사람들을 힘들게 하지를 않았다.

하지만 가끔씩 보지않고 있으면 식사하신것을 잊어버리시고 다시 식사를 하셔서 언젠가는 밥한솥을 다해치우시고 배가 무거워서 벽에 기대여 절절매셨다든지그런 에피소드는 있었지만

그이후로 언니는 냉장고랑 음식을 두는곳은 모두 자물쇠를 채울수밖에 없었다.

3년전 언니의 수술소식에 내가 휴가를 내어 언니를 보러 한국에 갔다가 언니보다는 형부를 돌보아야 했었다.

언니가 수술받느라 병원에 입원하는 동안 집안에 남겨진 형부는 도우미 아주머니와 실갱이를 하고 있었다.

도우미 아주머니가 낯설은 형부는 도우미 아주머니를 나가라고하고 도우미 아주머니는 형부의 치매와는 관계없이 불편하다며 형부를 불편해하고…..

나는 형부팔과 내팔을 묶어 연결하고 서울시내의 관광길에 나섰었다.

처음엔 형부와 함께 보조를 맞추어 걸어다녔으나 키가 크고 보폭이 넓은 형부는 금새 시야에서 사라져버리곤 해서 형부를 잃어버릴까봐 겁이나기에 유치원아이들을 함께 연결하는 줄로 둘이 연결해서 매고 영화관으로, 음악감상실로 ,책방으로, 연극을 보러도가고, 제과점에 가서 차도 마시고, 시장길에가서 길거리 음식도 사먹고, 박물관을 다니며 역사공부도하고, 건축교수였던 형부의 잃어버리지 않은 지식에 새삼 감탄을하며 건축물에 대한 교육도 받으며3주간을지냈다.

형부는 어디서 얻은 아이디어였는지 길거리를 나서기만 하면 머리에 수건을 뒤집어 쓰셨다.

그것도 노란수건 만을

나는 형부가 노란수건을 머리에 쓰고 다니는것을 행복해하기에 그냥두었다.

노란 세수타올을 뒤집어 형부와 내가 줄을 매고 서울거리에 나서면 사람들은 이것저것 구경하면서 신나게 다니는우리를 눈여겨보며 둘다 미친것들이라고 소근대기도하였으나 나는 전혀 상관치 않고 길거리를 다녔다.

인왕산 산책로를 걸을 때는 형부가 기억하는 옛날 동요를 몽땅 찾아내어 부르며 산길을 올라다녔다.

햇볕은 쨍쨍 모래알은 빤짝,

빤짝 빤짝 작은별 아름답게 비추네,

엄마가 섬그늘에 굴따러 가면,,,,,

내가 3주간의 휴가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오려고 짐을 챙기는데 커다란 가방에 짐을 쌓는 나를 형부가 보더니 물었었다.

막내처제 어디가?

집에요!

! 집이 어딘데?

시애틀요!

그래!

형부는 잠시 방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더니 방금물어본것을 잊어버리고 다시 묻는다.

막내처제 어디가?

집에요!

집이 어딘데?

시애틀요.

조금후 다시 반복한다.

막내처제 어디가?

그러더니 짐을 싸기전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사이 큰키(190) 형부가 내가 쌓고 있던 가방안에 자기몸을 어떻게 넣었는지 집어넣고는 옷가지를 더가지고 나를 보더니

막내 처제, 나도 데려가 !

이날 형부를 시선을 피해서 한참을 울었었다.

내가 중학교때 말쑥한 신사복에 검정테의 안경을 끼고 큰키로 우리집 문을 열고 들어서던 멋진 형부,

여학생이라는 잡지책을 나에게 선물로 주던 형부,

건축물양식에 대한 확실한 지식으로 열심히 대학강단에서 강의 하던 멋진 형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