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유감#1

지금으로 부터 30여년전, 내가 공부를 마치고 미국에서의 첫직장을 다닐 였다.

직장을 잡은 곳은 한국사람들은 거의 살지않는 미국의 중소도시였고 한국마켓도
없는곳이였다.

다만 몇몇의 국제 결혼을 하신분들이 일찍부터 미국엘 오셔서 미국인 남편들과 함께
가정을 이루고 거의 미국사람처럼 동화되어서 살고 있는 지역이었다.

한국분들 서너분만 계신곳에는 교회가 생긴다는 이야기가 있듯이 이곳에는 이분들이
그중 가장 나이많은 언니 집에 모여서 함께 음식도 나누고  언어가 잘 소통되지않는
답답함으로 내조국 언어로 실컷 수다도 떨면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는 그런
모임이 있었다,

 나중에는 이모임이 커져서 교회가 형성되었었다.

모이는 자매님들 고등학교를 졸업하신 분은 오직 한분 뿐이셨는데 그때 당시의 어려운
한국사정이 아들들은 공부를 시키고 딸들이나 언니 누나들이 동생들이나 오빠들에게
교육의 혜택을 주기위하여 공장이나 남의 식모로, 또는 여러가지 힘든 일을 하면서
일을하여 번돈으로 어려운 가정형편도 돕고 또한 동생들의 학비도 부담하던 그런 때였다.

내가 자리를 잡은 그곳은 그렇게 어려운 가정에서도 최선을 다해 살다가 한국으로 파견된
미국 군인들을 만나서 사랑을하다가 미국으로 들어오게 언니들이 많았었다.

나는 그곳에 자리를 잡고 있는 킴벌리 클락회사에 그때 당시에 한국의 유한양행,
나중에는 유한킴벌리라고 이름을 바꾼 회사에 한국으로 기술파견을 하게 되면서 직원들을
한국으로 파견보내기 직원교육을 담당하는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는 20대초기이지만
열정적인 애국관에다가 ( 나중에는 영사관에서 한국에 관한 비디오를 빌려다가 교육을
시키기도 했다.)어릴때부터 교회의 주일학교 다니며 아이들을 가르쳤던 나의 경험으로 많은
직원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 이들에게 한국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한국의 음식까지도
소개하며
영어와 한국말을 편하게 하던 나는, 그리고 가끔씩 한국의 노래까지 곁들여
가르쳐주는 그야말로 나는  이들이 부럽게 바라보는 나이어린  왕누나였다) 일주일에 3
이들에게 교육을 하면서 한국이라는 나라에 가기전에 미리 알고 가야할 것들을 알려주는,
어떻게 생각하면 직장이라기 보다는 민간외교가로서의 사명을 가지고 아주재미 있게 직장을
다니고 있었다.

직장생활은 아주 재미있었지만 나는 가끔씩 한국적인 정서가 너무나 그리웠다.

한국말로 신나게 떠들고 싶고 한국음식을 먹으면서 한국의 정서를 누리고 싶었다.

어느날, 지금은 없어진것으로 아는 판다로사라는 스테이크식당에서 미국인 동료들과
스테이크를 먹고 있는데 저만치 다른테이블에서 한국여자분들 여섯명이 힐끔힐끔 나를
쳐다보며 궁금해 하는것 같은 표정이었다.

나는 동료들과 식사를 하면서도 저만치 식탁에 자리잡은 동양여자들의 소근거리는 말소리가
한국말이라는것을 아는순간 내가슴이 뛰기 시작을 했다.

 그래!

 한국사람들인거야!

나는 그분들이 음식을 다먹고 식당을나가기전에 그분들을 만나야 겠다는생각에 내자리를
떠나 그분들에게 가서 안녕하세요라면서 인사를 드리니 이분들은 미리 나를 지켜보고
있는터이라  모두들 반갑게 맞이해주며 나를 자기들의 자리에 앉게 해주었다.

나는 직장동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이분들과 자리를 함께 하였다.

나와 함께 직장동료 두명은 식사를 마치고 일찌감치 식당을 나섰고 이날 저녁 우리는
(이미 나는 이언니들과 한팀이 되어서 우린 대한민국의 자매로써 이미 오래부터  안사이가
되어서..) 저녁 6시부터 밤열시 식당이 문을 닫기전까지 그동안 허기져있던 한국말로 실컷
수다를 떨고 언니들의 보살핌을 받게 되는 그곳 생활의 시작이 되었다.

이때부터 이곳에 사는동안 밥반찬은 언니들의 사랑으로 너무 배부르고 맛있는 식탁의
연속이었다.

 이때에는 여섯명의 언니들이 있었다.

이들중 학교를 제대로 다녀본 언니는 오직 언니 뿐인데 이언니도가정형편이 어려워
고등학교를 겨우 졸업을 했는데 미국군인을 만나서 어쩌다 미국까지 오게된 언니였다.

언니는 어느한국봉제회사에서 경리로 일을 하다가 군인이었던 현재의 남편인 짐을
만나게되어 이곳까지 와서는 여섯명의 언니중 유일하게 이곳에서 어쎔블 공장에 다니며
버는돈으로 한국의 동생들을 공부시키는 대한민국의 또순이 언니였다.

언니들을 만나게 되니 너무나 좋은 것이 언니들은 재주들이 좋아서 신통치않은
재료를 가지고도, 예를들어 마늘과 고추장된장 만있으면 훌륭한 된장찌개를 만들기도
했고, 이때에는 김치도 된장도 없어서 언니들은 양배추로 김치를 만들어먹고 나중에는
자기들이 배추씨를 한국에서 가져다가 배추를 길러서 김장을 해서 먹기도 하였다.

언니들은 모두가 집에서 살림만하고 있었는데 모두들 한이되는것이 영어를 알아듣기는
하여도
영어를 쓸줄알거나 제대로 정확한 영어를 모르는것이 너무나 불편하다고 했다.

이언니들의 얘기를 듣는순간, 나는 주일학교 선생기질이 발동하여서 이미 머릿속으로
이들에게 영어교육을 시켜야 겠다고 생각을 하고 교재를 만들고 도서관에서 유아기 책을
빌려다가 카피를 하여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일주일에 한번씩 모여서(매주 토요일날
아침 8시부터 낮두시까지)알파벳교육을 시키며 미국삶에 대해서도 조언을 하고는 했다.

언니들의 소원은 자식들에게는 이야기 책을 읽어줄수 없었지만 손자들에게는 영어로
이야기책들을 읽어줄수 있는것이 꿈이었고 소원이어서 내가 운영하는 토요학교는
어느새 우리집에서 두시간거리에 있는 매네토악에서 장거리 운전을하고 오는 학생들까지
합쳐서 내좁은 방은 이미 만원을 넘어섰다.

나는  우린 제일로 나이가 많은 언니의 집을 빌려달라고 얘기를 하려는 중이었다.

언니의 집은 크기도하지만, 커다란 홀이 있어서 여러명의 학생들이 공부를 하기에는
정말로 편안한 장소였는데 언니는이핑계 저핑계를 대며 자기집에서 모이는것을 피해다녔다.

그러던 어느날 이언니가 나를 혼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언니하고 마주 대고 앉아 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가슴이 아파서 한참을 울었었다.

언니의 고백은 자기는 한국말은 하지만 한글을 쓸수도 읽을수도 없어서 다른 언니들이
혹시라도 알게 될까봐 불안하다는이야기였다.

언니에게 알파벳을 가르치며 단어를 영어로 써주는데 한국말로 토를 달아주어도
이언니는 절대로 진도가 나아가질 않아서 조금 염려를 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언니의
인생살이 얘기를 들으니 충분히 그럴만하고, 그래도 그고달픈 인생살이를 지내고
마음씨 착한 미군인던 남편을 만나 행복하게 사는모습이 가슴벅차게 감동이 되어왔었다.

언니는 7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린 4동생들의 밥을 해먹이며 아이들을 돌보다가
13살때 재혼하신 엄마를 보내드리고 몸이 불편하신 할머니와 함께 사느라 국민학교는
입학만 하고서는 학교엘 다니질 못해서 한글을 깨우칠 기회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