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찌고 상 (1)

장기간의 여행이었다.

처음 계획은 711 한국가는 계획이 었었다. 아버지가 충청도에서 낳으시고 자라셨다. 지난해 000회장님께서 한번 만나자고 하셨다. 몇번을 만날 약속을 하면서도 회장님 스케쥴과 시간이 맞추어지지를 못해서 뵙지를 못하던중 11 이분께서 우리사무실로 오시겠다고 하셨다.

정부 베네핏이 필요해서 사무실로 오신다면야 언제든지 웰컴이지만 나를 만나러 직접 오셔야 겠다는 말씀에 미안하기도 했지만 내사무실 사정이 조금이라도 시간을 내기가 힘이들어서 어렵지 오시면 감사하겠다고 말씀드리고는 했는데 약속하나가 소되어 회장님을 사무실 근처의 커피집에서 만나 뵙기 하고 시간이 되어 약속장소로 나가니 회장님께서는 만나자 마자 할아버님이 공주사범 나오시고 성함은 000님이시않냐고 물으신다.

네…

할아버지는 공주사범을 나오시고 그쪽 지역에서 오랜시간 교편생활을 하시다가 나중에 교장선생님으로 은퇴를하셨다.학교에 계시면서도 한의학을 배우셔서 무료로 침도 놓아주시고 사비를 털으셔서 약을 지어주시고는 했던 분으로 00지역에서는유명하셨던 분이셨다. 회장님은 그러면 우리 단체좀 도와줘야겠어! 라고 말씀을 하시더니 아직 젊을때 봉사해야 한다면서 무조건 000 에서 일을보아달라고 하셨다. 며칠간 고민을 하다가 그럼 우선 새로운 회장님을 뵙고나서 제가 무슨일로 도울지 있을지 들어보고나서 결정하겠다고 하고서는 얼마후부터 000 일을 돕게 되었다.

000에서는 매 격주년마다 학생들을 데리고 한국투어를 하는데 비행기값외에 돈을 조금 더보태면 여행기간중에 숙박비, 식비, 차비등은 한국에서 대어주며 한국을 알리고 학생들에게 교육이 되는그런 여행이었다. 학생들이 35명정도가 등록이되고 몇분의 부모님도 함께가시기로해서 여행이 결정된지 얼마후 아직 한달간의 시간이 남았는데 평소에 건강하셔서 100살은 넉넉히 장수하실것같은 어머니께서 폐렴으로 병원에 입원을하셨다는통보를 받고 한국에 있는가족과 몇번의 통화가 오고간 어느날 저녁에 언니로부터 연락이 왔다.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한국에서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고도 이것저것 일들이 많아서 알지 못하는 한국사회를 찾아다니며 일을 보고 다니는데 711 이되면서 인천공항에서 시애틀에서 학생들30여명과 부모님들, 회장님과사장님 두분들과 함께 만나서 투어버스를 타고 충청남, 북도의 명승지와 독립기념관, 자연학습원,그리고 자연놀이공원, 청화대방문등의 10일간 함께 다니며 산교육을 하게되었. 날씨는 더워서 밖에나가면 햇살이 우리를 뜨겁게 했지만 로운 한국의 발전상과 충청남북도에서 파견나오신 관계자들의 세심한 배려로 매끼마다 맛있는음식과 훌륭한 대한민국의 발전상과 옛모습등을 접하면서 너무나도 감사한 시간을 보내고는 애틀로 돌아올수 있었다.

이들과 함께 여행을 하면서 물론 어머니를 보내고 몰려오는 나의 슬픈마음은 아프지만 학생들과 함께 하면서 저만치 밀어놓아 었다. 아이들에게는 첫번이자 마지막일수 있는이번기회를 내개인적인 감정으로 망가뜨리게 할순 없었다. 그리고 부모없이 집을 떠나고 온전히 우리 인솔자를 의지하고 있는 12살부터 21 사이의 청소년들을 즐겁게 해야할 의무가 나에겐 있었다. 슬픔을 저만치 묶어두고 아이들의 즐거움을 위해 함께 하기 작하였다.

마침 한국말들을 거의 못알아듣는 학생들이 너무나도 많아서 는곳마다 통역을 해주며 이들의 이해를 돕고 틈틈히 아이들이 루해할 양이면 재미있는 이야기나 노래들을 시켜가면서 학생들 즐거움을 위해 마음을 썼다.

아이들 수준에서 아이들하고 대화를하고 우린 함께 낄낄거리고 하하,호호,허허 틈만 나면 아이들과 대화를하고 아이들을 안아주며 아이들과 했다. 덕분에 학생들에게는즐거운 모국방문의 경험이 되어져 너무나 감사한 마음이었다.아이들을 다재우고 내방으로 돌아온 혼자 있는시간이 겁이 났었다.혼자 있으면 슬픔이 몰려와서 눈물이 방울 방울 떨어져 내렸다.

어찌 이별이 이렇게 클줄이야?

더구나 세상에서 불러도 불러도 지치지 않는 엄마라는 이름을…….. 자면서도 엄마모습을 생각하며 눈물짓고도 새벽이면 생들보다 두시간 먼저일어나 조깅복을 입고 달렸었다. 내가슴은 저만치 밀려놓은 슬픔의 무게가 나를 짓누르며그리움으로 몸부림치게 하였지만 새벽공기를 가르며 새로운 거리를 리며 슬픔을 삭히고 아침에 일어나서 식탁에서 마주하는 반짝이는 청소년들의 눈망울을 바라보며 어머니를 보낸 슬픔을 혔었다. 정확히 한달의 시간을 한국에서 내고 이곳 시애틀로 돌아와 며칠을 잠만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