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씨 과장님(1)

엄마가 남기신 집을 정리해야 하는것과, 어머니가 유서를 작성하시고 돌아가시지 않으셨기에 큰 재산은 아니지만 형제들과 분배하는 과정과, 어머님 사망신고, 또는 그외에 할일들이 생각보다 많은데 이미 오래전 큰오빠와 막내오빠는 간암으로 돌아가시고 다른형제들은 외국생활들을 하시고 한국에 사시는 큰언니는 작년에 대장암 수술을 하면서 투병중 눈에 문제가 생겨서 거의 눈이 안보이는 상태라서 운전도 못하시고 서류를 제대로 읽지 못하셔서 도우미의 도움을 받고있는중이다.

아무래도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서의 사후정리는 막내딸인 내가 해야 할 일인것 같다.나도 시애틀 사무실에 일이 너무나 밀린 상태라 오래 머무른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지만 다시 미국으로 갔다가 한국으로 다시 나오는일도 쉬운일이 아닌듯하고 또한 엄마가 남긴 삶의 잔재들을 내가 만지고 거두고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감사하게도 사무실에 이메일을 띄어 상황을 설명하니 편의를 봐줘서 별어려움 없이 이곳에서 더 머무를수가 있게 되었다.우선 엄마가 사시던 빌라의 화단에 매일 아침 꽃들에게 물을 주는일로 하루를 시작하였다. 엄마는 꽃을 너무나 좋아하셔서 화단에는 꽃집에서나 볼듯한 여러종류의 꽃들이 엄마가 아프시는 동안 엄마의 손길을 받지못한 채 시들시들해져가고 있었고 더러는 아주 말라서 다시는 살아날것 같지도 않은 모습이었다. 엄마의 화단에는 빨간색, 노란색, 핑크색 채송화들 사이사이를 코스모스들이 꽃을 피우려 하고 있었고 맨드라미, 히야신스, 칸나 등그외에도 다양한 꽃들이 엄마가 세상을 떠난지도 모르며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 역시도 돌아가신 엄마 생각에 정신을 차리고 엄마가 돌보던 꽃들을 생각하기까지에는 시간이 걸렸으므로 어제부터 돌보기 시작한 꽃들하고의 만남이 처음엔 어찌해야할까?라는 염려가 들었었다.하지만 감사하게도 엄마가 아프신 동안 돌보아주지 못했던 꽃들은 시들시들해져서 곧 죽을것만 같았는데도 쏟아진 소나기에 목을 축이더니 쓰러진 몸을 꽃꽃히 세우면서 예쁜얼굴들을 보여주기 시작을 했고, 난 화단에 함께 자라나는 잡초들을 뽑아주며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꽃들하고 얘기를 하기 시작을 했다. 잘있었니?예쁘게 자라주어서 고마워. 그동안 우리엄마를 행복하게 해주어서 고마웠어!나도,너희들 때문에 행복하단다. 꽃들하고 이런저런 얘기를하는데 돌아가신 엄마가 옆에 계실것만같은 생각에 뒤를 다시한번 돌아버리게되고 슬픈 마음에 눈물이 흘러내린다.

이 화단의 꽃들을 어떻게 해야하나? 이아이들을 예뻐해주고 가꾸어줄 누가 없을까?
옥상의 화단에서는 엄마가 어떻게 옥상을 오르락내리락 하셨는지 너무나 궁금할 정도로 강낭콩, 오이, 호박, 부추, 깻잎등이 한동안 엄마의 손길도 닿지않았는데도 건강하게 자라고 있었고 나는 다자란 야채들을 따다가 식탁을 마련하고 잘 여문 동부콩으로는 끓는 소금물에 삶아서 건져낸다음 물기를 뺀후 후라이팬에 살짝 볶아서 식힌다음 지플락 백에 한줌씩 담아서는 냉동고에 넣어두었다. 볶은콩은 우리엄마가 우리에게 잘 만들어 주시던 간식중의 한가지였다. 요리를 하면서도 머리속으로는 평생을 부지런하게 사시던 엄마의 모습을 그리워하며 가슴 한구석 깊숙히 밀려오는그리움에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숨을 쉴수가 없게 그리움이 몰려왔다.엄마, 돌아가시기전 뵈어야 했는데….집안 구석구석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엄마가 연세가 많으셔서 일하는 분이 살림을 도와주셨기에 부엌등과 옷장등은 정리가 잘 된 상태여서 그다지 치울일은 없지만 매듭을 하시던 할머님의 영향으로 매듭을 배우신 엄마의 반짓 고리에는 엄마가 매만지시던 곱게 물을 들인 명주색실들이 찿아주지않는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나는 색실들을 모두 모아서 싸놓은후 올케언니들에게 전화를 했다. 원하시면 다드리려구 …엄마의 반짓고리에는 지금으로부터 50여년전 할머님이 감아주셨던 실타래와 골무, 지금은 더이상 만들지도 않는 촌스러우면서도 정겹게 느껴지는 옛날단추등이 있었다. 옷장을 열어 엄마의 옷을 정리해서 어려운 지역에 있는 노인정 어른들에게 갖다드리려하니 옷장안에는 엄마의 트레이드마크이기도한 모자들이 옷장벽에 걸려 있었다. 엄마가 모자를 좋아하셨기에 모자만 40여개가 되었다. 엄마는 유난히도 모자를 좋아하셨는데 햇빛이 쨍쨍내려쪼여도 웬만해서는 모자를 쓰지않는 나하고는 다르게 엄마는 어떤 모자를 쓰셔도 멋있고 우아하셨었다. 모자20여개를 꺼내어 집근처의 세탁소아저씨에게 세탁을 맡기려니 이곳에서만 40여년을 세탁소를운영하시고계신 세탁소 주인아저씨는 엄마를 너무나 잘아셨다. 내가 모자가들어있는 비닐백을 갖고세탁소 안으로 들어서자 주인아저씨는 어이구! 양갱할머님 돌아가셨나베? 양갱할머니는 엄마의 별명이셨다.엄마는 양갱을 잘만드셨었다. 팥양갱, 녹두양갱등을…겨울이 되시면 엄마는 커다란 다라에 수북히 팥을 넣고 하룻밤을 불린후 깨끗이 껍질을 벗기어 내시며 씻으시기를 몇번째, 다 씻은 팥을 뒷곁에 놓여있던 가마솥에 푹 삶은후 팥을 건져내어 으깨기 시작하여 어느정도 앙금이 생기면 커다란 체에다가 그앙금을 받아내시어 검은 설탕과 계피가루를넣고, 그앙금을 불에 타지않게 어느정도 저은후, 커다란 네모틀에 앙금 끓인것을 넣고 밤새 식혀내셨다. 그리고 다 식은 틀에 굳은 양갱을 먹기좋은 사이즈로 잘라서 아랫집, 윗집 나누어주시고도 우리형제들은 겨우내내 그다지 달지않은 양갱을 늘 간식으로 먹을수 있었다.

엄마가 미국에서 함께 사시다가 다시 한국으로 나와 사시게 된것은 연세가 더욱 많아지시면서 외로움을 느끼시면서 부터이었다. 마침 미국에 오실때 재산을 정리하시고 오지않으셔서 다시 한국으로 나오셔서 사실수 있는 집이 있으셨고, 또 인천대학에서 교편생활을 하시던 큰언니부부도 자주 찾아 뵐수가 있었기에 쉽게 결정을 내리셨는데 4배드룸인 집안에 80대 노인 혼자 사시는것이 불안하여 함께 자란 집안동생을 불러서 혼자사시던 엄마하고 한집에 살게되어서 멀리사는 우리 형제들은 얼마나 다행인가 생각하고 동생에게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 들었었다. 동생은 친자식처럼 엄마에게 너무나 잘하며 사실상 엄마를 모셨는데…엄마는 돌아가시기전 이동생이 염려되어서 우리에게 신신 당부 하셨었다. 인생 잠깐이다.내가 없더라도 이애를 돌보아 주어라. 먼 집안동생은 엄마에게 너무나 잘했었다 했다. 첫번째 결혼을 실패하고 나서는 혼자 사는것이 편하다며 혼자 지내다가 엄마가 다시 한국으로 오셔서 한국에서 사시는 것으로 결정이 되면서 함께 살게 되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