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헤어지지 말아요”

헤어지는 것은 참으로 슬프다. 나에게 첫번째 헤어짐의 경험이란 내가 어릴적 우리 할머님의 죽음이었다. 할머님의 연세는 99 살이셨고 아주 정정하셔서 아침 일찍 일어나 묵상하시고 아침식사로는 찹살떡 한 조각하고 사과 한개를 드시느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셨다. 할머님은 우리들을 위하여 사탕이나 과자 같은 것이 생기시면 꼭꼭 싸매어서 두셨다가 우리가 학교엘 다녀오면 꼭꼭 싸두신 과자나 사탕같은 것들을 꺼내어서 우리형제들을 주시면서 “아이구! 내새끼! 이뻐라” 하시면서 우리 형제들을 토닥거리시며 예뻐해 주셨다. 가끔씩 할머니와함께 잠자리에 들을 때가 있는데 할머니는 잠이들기전 옆에 누워 있는 나에게 따뜻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 주셨는데 “정이월 다가고 삼월이라네… 강남갔던 제비가 돌아오면은 이땅에도 봄이 온다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이런 노래를 불러 주셨었다. 노래를 들으면서 잠이 든 내가 눈을 떠서 일어나보면 아침이었는데 할머니는 누구보다도 먼저 일어나셔서 방안 윗목에서 고개를 숙이시며 묵상을 하시고 계셨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자식들, 손자들 복된삶 살라고…….

그날도 나는 할머님방에서 함께 잠을 자고 있었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할머님은 아직도 주무시고 계셨다. 나는 할머니가 고단하신가보다 하고 살짝 일어나 학교 갈 준비를하는데 할머니가 조금 이상했다. 할머님의 몸이 평소보다 차가운 느낌이 들고 왠지 평소의 주무시는 모습이 아닌 낯설은 자세와 모습이셨다. 그래서 할머님을 흔들어보기 시작하는데 할머님은 미동을 안하셨다. 나는 와락 겁이나서 할머님의 코가까이에 귀를 대고 숨결을 느껴보려고 했으나 할머님의 코에서는 항상 따뜻한 숨결이 느껴졌는데 아무런 숨결이 나오지않았다. 별안간 무서운 생각이든 나는 소리를 지르며 엄마 아버지를 찾았다.
할머님은 돌아가셨다. 전날 밤 할머니와 나란히 누워서 내머리를 쓰다듬으며 우리 예쁜 손녀 이다음에 커서 남을 도와주는 좋은 사람 되게해달라고 기도해주시면서 누워있는 내얼굴을 쓰다듬어주시며 늘 불러주시던 “ 정이월 다가고 삼월이라네….. 노래를 불어주시던 할머님은 아무런 말씀도 않하시고 다른 세상으로 가신 것이다.

사람들은 호상이라고, 자녀들이 축복 받은 것이라고 할머님이 하루도 앓지 않으시고 잠을 주무시다가 돌아가셨으니 복이라고, 어찌 노인네가 한점 흐트러진 모습도 안보이시고 곱게 가셨다고 말을 하면서 할머님의 죽음을 이야기 했지만 나는 할머님이 돌아가신 이후 밤이되면 잠자는 것이 무서워졌다. 한참을 잠을 이루지 못했다. 혼자서는 더욱 잠을 잘 수가 없었고 엄마나 아버지가 옆에계셔도 불안해서 잠을 이룰수 가 없었다. 내가 자는 도중 내곁에 있는 엄마가, 아버지가 돌아가실까봐……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그 날 이후 나는 헤어짐이 너무 힘이 들었다.
내가 중학생일 때에 우리 집에는 독일산 세퍼드와 잡종개 사이에서 태어난 개가 있었다. 이름을 봉구라고 불렀는데 봉구는 말 잘안듣는 우리 삼촌이름이었는데 여러가지 말도 잘 안듣고 제구실도 못하는 우리 삼촌이 못마땅해서인지 우리 아버지는 개이름을 봉구라고 짓고서는 봉구를 예뻐하다가도 가끔씩 봉구를 구박하고는했다. 그래도 봉구는 아버지를 제일로 좋아했다.아버지는 봉구의 밥을 챙겨주시고 시간되시는대로 봉구를 데리고 산책을 하시고는 하였기에……

봉구는 아주 영리해서 엄마가 시장엘 가면 졸졸 따라가면서 자그마한 장바구니를 입에다 물고서 엄마의 뒤를 졸졸 따라 다녔다. 엄마가 장을 마치고 봉구가 물고오는 장바구니에는 계란 한줄 돼지고기 한근, 양파 서너개가 들려 있었다. 나는 봉구를 아주 자랑스러워 해서 내몸보다 더큰 봉구를 끌고서 동네 한바퀴를 돌며 으시대기도 하였다. 봉구는 우리형제들이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길 기다렸다가 우리들의 발자욱 소리가 들리면 저만치서 달려 나와서 우리를 맞이하며 반갑다고 벌떡 벌떡 두발을 들고 우리를 반기며 몸을 부비대었다. 봉구는 우리형제들의 제일 좋은 친구였다.

어느 맑은 하늘 의 여름날이었다.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집으로 돌아오는 데 집가까이 와도 봉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집안에 들어서며 집안일을 돌보며 함께 살고 있던 먼 친척꼭지언니 에게 봉구의 소식을 물어보니 꼭지언니는 봉구가 언제 없어졌는지도 모르고 만화방에서 빌려온 선데이 서울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나는 나하고 별 나이 차이도 나지않는 꼭지언니에게 소리소리 질러가며 “언니! 너 만약 봉구 없어지면 죽을 줄알아” 라며 꼭지언니와 함께 봉구를 찾으러 이 골목 저골목을 다 누비고 다녔다. 봉구를 찾지못해서 겁도나고 화가 난 나는 꼭지언니에게 평소에는 아버지 무서워 한마디도 사용할 수 없던 욕을 해대가며 “네가 책임을 져야 한다며 협박을 하고 있을 때에 평소보다 일찍 들어오신 아버지와 엄마 그리고 온식구가 봉구를 찾으러 온동네를 헤메였다. 한참을 봉구를 찾아헤미던 우리에게 아버지는 무슨생각이 들었는지 우리 형제들에게 집뒤에 있던 산으로 가보자고 했고. 얼마동안 인왕산을 타고 올라가니 저쪽 산 마루 한구석에 연기가 피어올랐다. 아버지는 우리 형제들과 함께 그쪽으로 발을 옮기셨고 , 우리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에는 우리 모든 가족들은 보고싶지 않은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우리봉구는 이미 목아지가 잘려 나가고 몸은 긴 쇠꼬챙이에 끼워져서 타오르는 장작불에 그을리고 있었던 것이다. 옆에는 솥단지에서 물이 끓고 있었다. 이광경을 목격하신 아버지는 우리가 말릴 틈도 없이 옅에 있던 나무가지 휘어진것을 잡아채시더니 몸을 날려 그곳으로 돌진을 하고 계셨고, 아버지가 성난 모습으로 달려오는 것을 본 동네 건달들 7명은 이리저리로 흩어져 버렸다. 이미 봉구는 그슬려 버렸다. 우리 형제들은 그자리에 얼어붙었다. 이날 이후 나는너무 힘이들었다.

내가 아이들을 키우면서 물고기 몇마리를 커다란 어항에 기를 때이다. 물고기에 전염병이 들어서 물고기가 한마리씩 죽어나가기 시작을 했다. 나는 죽은 물고기를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아이들은 내가 물고기를 건져내어 어떻게 해주길 기다렸지만 나는 아이들에게 아빠가 올때까지 기다리자고 하였고 죽은 물고기는 허연 배를 내놓은채 물에서 둥둥떠있었다. 남편이 돌아와서 죽은 물고기를 건져내어서는 9살 6살 두 딸아이와 함께 휴지에 싼 후 종이 박스에 넣어서 집 뒤곁에 묻어주고 장사를 치루었다. 아이들은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이 얘기를 한다.

나는아직도 헤어짐을 마주하는 것이 아주 많이 힘이든다. 간혹 아는 지인들의 장례식이 있을 때면 나는 그곳에 가야한다는 부담 때문에 며칠동안 잠을 설친다.

homeless프로그램에서 일을 하면서 어제 만나서 미래에 대한 goal and plan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client 한 사람이 다운타운 차이나타운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었다. 사건조사를 위해 나는 이 죽음을 대면 해야 되었었는데 , 너무나 두려웠다. 만나기가 싫었다. 할 수만 있다면 멀리 가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