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벽돌집의 추억(?)

빨간 벽돌집의 추억(?)

위스콘신 에서도 작은 마을, 써링이라는 곳에서 남편이 직장일로 발령받아서 살 때 이야기이다. 인구는 2000명 정도 마을사람들은 독일계통과 노르웨이 계통의 사람들이었는데 사람들이 무척이나 친절하고 씩씩했었다.

2000명 중에서 우리가족이 유일한 동양 사람이고 또한 한국 사람이었다. 동네 사람들 중엔 6.25가 나던 해에 한국에 있었던 한국참전용사들이 있어서 한국을 기억한다면 전쟁 통에 지붕이 날아가고 폐허가 된 집들과 건물들, 피난민들이 배고파하는 모습과 집 잃는 고아들이 울던 모습 등이었다.

우리 가족이 이사한 곳은 그 동네에서도 제일로 좋은 지역에 있는 빨간 벽돌집으로 방이 6개에다가 (겨울에는 눈이 많이 와 밖에 나갈 수가 없을 정도였는데 집이 일자로 되어있어서 아이들은 집안에서 세발자전거를 타며 놀 수 있었다.) 집안바닥은 대리석으로 되어있었고 뒤뜰에는 잔잔하게 흐르는 시냇물(Brook)이 있었고 밤이면 비버들이 나무를 쓰러뜨린 후에 그 긴 이빨로 사각사각(지금도 그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나무를 깎아서 댐을 만드는 소리가 들리고 거실에 앉아있으면 산마루에 있던 사슴 가족이 놀러와 뒷마당에 있는 크렌베리 나무 열매를 따먹으며 한가로운 모습을 보이곤 하였고 우리가족은 사슴이 놀래서 도망가버릴까 집안에서도 발 뒷꿈치를 들고 다녔다. 아이들은 뒤뜰에 사슴이 와 있으면 손가락을 입에 대고 (엄마! 쉬 조용히 해야 해. 지금사슴이 밥 먹고 있어.) 때때로 눈에 띄는 것은 수달이 배 헤엄을 하면서 잡은 은빛의 물고기를 하늘로 던졌다 내렸다 하면서 장난을 치다가 싫증날 때면…. 아이들과 나는 잡힌 물고기가 안 되어서 안타까워했지만 물고기는 벌써 수달에게 맛있는 식사가 되었었다. 우리가 살 집으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동네에서 키우는 사슴우리가 있었는데 동물원에서 볼 수 있는 사슴들이 어미사슴들과 태어난 지 며칠 안 되는 예쁜 밤비들이 있어서 우리 아이들은 옆에 있는 잡풀을 뜯어다가 사슴우리 밖에서 사슴아 이리오렴! 불러보며 가까이 와 풀을 받아먹는 사슴을 너무나 신기하게 바라보며 박수를 치며 즐거워했다. 어느 날 집에서 한시간거리에 있는 시내로 쇼핑을 하고 들어오는 집 길목에 자그마한 예쁜 밤비가 우리 밖으로 나와 있어서 마침 저녁이라 사슴우리를 관리하는 이들과 연락을 할 수가 없어서 예쁜 밤비를 우리 집으로 데리고 와서 아이들과 함께 둘째딸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security blanket (자기를 보호해줄 수 있는 정든 자기만의 이불)으로 감싸주며 온 식구가 밤에 잠을 못자고 거실 한구석 박스에 있는 밤비를 보살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사슴 관리인에게 연락을 하니 당장 온단다. 나래와 송이는 밤비를 더 데리고 있고 싶어했기에 밤비를 보내려니까 눈물을 흘리며 속상해했지만 “나래와 송이가 엄마가 없으면 살 수 있을까? 밤비도 엄마가 없으면 살수가 없는거야.” 설명을 해주니 눈물을 뚝 그치고 자기들이 안고서 사슴우리까지 가겠다고 해서 자그마한 밤비를 두 아이가 함께 안고 우리까지 갔다. 사슴우리는 우리 집에서 100 미터 거리도 되지 않아서 아이들은 눈만 뜨면 쪼르르 달려가서 아침인사를 하고 오고는 했다.

우리는 교회엘 가게 되었는데 처음 교회에 간 날 아마도 이 교회 다니는 사람뿐만 아니라 이 동네 사람들은 다 모인 듯하게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동양 사람이라고는 전혀 구경하기 힘든 동네에 온가족이 이사를 오자 입소문을 타고 어떤 사람들일까? 궁금해하던 모든 이들이 교회에 온 것이었다. 예배당은 자리를 찿을 수가 없게 사람들로 꽉 들어차서 정말 앉을 틈조차 없었고, 사람들은 예배보다는 우리가족을 살펴보는 것을 더 즐거워했다. 매주 예배를 마치면 교회의 elder 로 있는 케니 올슨과 부인이 우리가족을 초청하여 교회 옆에 있는 동네식당에서 점심을 함께 먹었는데 시카고 시내에 살면서 학교엘 다니며 한국음식과 도시의 음식에 익숙해졌던 우리가족에게는 여기 식당의 음식들은 방금 밭에서 캐어낸 감자로 만들어진 해시 브라운, 집에서 직접 만든 햄과 방목하여 기른 치킨 이 낳은 계란, 그리고 신선한 우유까지 실컷 먹을 수 있었다. 써링으로 이사한지 6개월 만에 우리가족은 불어난 몸무게 때문에 비상사태 선포를 내려야했다. 그때에 나래와 송이는 5살, 3살이었다. 우리아이들은 케니를 할아버지라고 부르며 일요일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고, (아무리 집에서 내가 같은 음식을 해주어도 아이들은 동네 레스토랑에서 자기들이 모든 이목의 중심이 되어 사랑받으며 먹는 음식과 뭐든지 듬뿍듬뿍 넣은(버터) 음식에다가 자기들이 원하는 음식은 엄마의 재제없이 먹는다는 행복감에 엄마 내일 또 일요일 이예요? 묻고는 했다.

나는 동네사람들에게서 독일 음식 만드는 법을 배우기도 하고 치킨과 소꼬리 그리고 각종야채를 커다란 솥에다 넣고 장작불로 함께 푹 끓여서 먹는 “치킨부야”도 아주 좋아하게 되었고, 가끔씩 목장하는 사람들이 가져다주는 우유를 가지고 치즈를 만들어서 먹을 줄도 알게 되었고 독일 사람들이 즐겨 먹는 potato pancake 에다가 집에서 만든 애플소스를 얹혀놓고 먹는 것을 즐겨 먹게 되었으며 누구보다도 맛있게 sour cruet(독일식 김치)을 만들 줄알게 되었다.(한국 사람들이 김치 만드는 법과 비슷하니까) 노르웨이계통의 동네사람들에게는 생선을 저려서 먹는 생선 피클도 배우게 되었고, 젊은 주부들이 모여서 굽는 쿠키 CLASS에 들어가서 각종 예쁜 모양의 맛있는 쿠키도 구워냈다. 내가 만든 쿠키는 너무나 맛있어서(?) 멀리 시카고에 사는 나의 가족과 친지들에게 선물로 보내지기도 했었다.. 하루 전날밤에 밀가루에 이스트, 들어갈 재료를 넣은 후에 반죽을 해놓고 다음날아침에 빵을 구워서 아침식탁에 올려놓으며 내가 좋아하는 카마메일 차 한 잔과 함께 FM에 서 나오는 좋은 음악과 함께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동네사람들이 갖다 준 각종 야채로 병조림(canning)을 만들어 겨우내 먹을 먹거리를 준비하기도 했다. 동네사람들이 잡은 곰 고기를 병조림하여 시카고에서 놀러온 친구들에게 별미로 제공하기도 하였는데 친구들은 맛보다는 신기해하며 즐거워하기도 했다. 곰 고기는 야생냄새가 진하여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우리가족은 조금 부담스러웠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가 이곳으로 이사 온 다음날 죠앤과 애블(애블에게 왜 이름이 able이냐고 물어보니 자기는 어릴 적 가난해서 초등학교만 나왔는데 부모님이 좋은 이름을 지어주셔서 뭐든지ㅡ 다할 수 있다는 설명 이었다)이 우리 집에 왔었다. 미국에서는 남의 집을 방문하려면 미리 전화로 물어보고 방문 한다는 원칙이 이곳엔 없었다. 동네사람들은 지나가다 들렀다며 옥수수딴 것도 가져오고 파이를 만든 것을 먹어보라고 들르기도 하여서 우리가족은 아침에 일어나면 몸을 단장하고 있어야만 했다. 죠앤의 손에는 소시지봉투가 들려 있었는데 베니슨 소시지인데 맛있으니 먹어보란다. 그때에는 이사 온 지 며칠이 안 되어 아직 집안 정리가 안 된 상태여서 집안이 아직 어수선하고 마음도 정돈이 안 되었으나 사람들은 환영한다며 계속 드나들었다. 도시와는 상상이 안 되는 광경이었다. 여기는 작은 마을이고 모든 동네사람들은 진짜 남의 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 까지도 알만큼 서로의 교제가 있는 곳이다. 하여튼 죠앤은 우리를 환영 한다며 베니슨 소시지(며칠을 먹고도 남을 만큼의 양)를 선물로 주었고 우리가족은 밥하고 샐러드 그리고 베니슨 소시지를 구워서 맛있는 식탁을 준비하여 며칠 동안 베니슨 소시지를 먹으면서도 질리지가 않았다. 죠앤이 만든 베니슨 소시지는 아주 맛있어서 우리가족은 평소에 고기를 잘 안 먹는데 매번 베니스 소시지를 반찬으로 주니 얼마나 잘 먹던지!
며칠 후에 집안정리가 끝나고 죠앤이 다시 놀러왔다 이번에는 옥수수가 잘 익었다며 옥수수 한 바구니하고 토마토를 가지고 왔다.
한참을 이 얘기 저 얘기 하다가 죠앤은 나에게 물었다.
“ Regina, how was benison sosage?” 나는 속으로 소시지이면 소시지이지 베니슨 소시지는 또 뭔가? 그리고는 “Joann! What is benison sausage?” (베니슨 소시지가 뭐지?)
죠앤은 너 그것도 모르냐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그것은 deer meat(사슴고기)로 만든 소시지란다. 죠앤의 말을 듣는 순간 나의 위장은 메스껍기 시작하며 급기야는 화장실로 달려가 며칠 전에 먹고 소화가 다 되어진 소시지를 토하려고 컥컥 댔다. 그러나 속에서 신물만 나오는 것이었다. 그래도 무엇인가 꺼림칙하여 설사가 시작이 되었으며 그로부터 연 사흘간 복통과 설사로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배를 쓰다듬어야 했으며 머릿속에 새겨져있는 예쁜 밤비를 먹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려 며칠 동안을 징징거렸던 기억이 있다. 물론 아이들에게 엄마의 고통을 설명을 할 수 없었다. 5살 나래와 3살 송이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밤비를 두 번 다시 죽일 수는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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