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축구와 대학 입시 2

이 칼럼을 쓰고 있는 월요일 오전, 이제 몇시간 후면 시작될 월드컵의 16강 전인 브라질과의 경기를 기다리며 가슴이 벅차 조금은 답답한 마음으로 글이 잘 진행되지를 않는다. 우리 아이들이 시험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지만, 꼭 봐야하고, 상당히 중요한 결과가 될 시험을 몇시간 앞두고,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할 때의 그 뭔가 더부룩하고 걱정이 되는 마음이 이렇지 않을까 추측을 해 본다. 지난 칼럼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일주일 전 월요일에 경험한 일이 부분적으로는 ‘데자뷔’가 아니기를 기대하는 마음이다. 지난 칼럼을 잠깐 돌아 보면, “몇 시간 전 새벽 5시에 이른 잠을 깨, 카타르 월드컵에 나선 우리 한국 국가 대표 축구팀의 경기를 보며 ‘손에 땀을 쥔다’는 말을 실감했다. 가나와 일진일퇴의 경기를 했지만 아쉽게 진 여운에, 몇 시간이 지난 지금도 마음이 불편한 나 자신을 바라 보며 “아이구, 애국자 났네”하며 실소한다. 무엇이든 주어진 상황에서 열심히 준비하며 다음을 기약하면 포르투갈과의 다음 경기에서 좋은 결과가 있겠지 하며 마음을 가다듬어 본다. 2002년 한일 월드컵 예선 3차전에서 강호 포르투갈을 1:0으로 꺾고 월드컵 사상 처음으로 16강에 진출한 기억이 새롭기 때문이다. 독자 여러분이 이 칼럼을 읽으실 주말에는 이미 포르투갈과의 경기 결과가 나와 있을 터이지만, 다시 한 번 ‘대~한민국, 짝짜작 짝짜’를 외칠 좋은 결과를 위해, 아니 그 과정을 즐기기 위해 마음을 다해 본다.”

그리 중요하지 않은 내용을 귀중한 지면에 다시 인용한 것은 필자 나름의 깨달음을 나누기 위함이다. 그 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알게된 사실에 대한 경외의 느낌이다. 불과 일주일도 안된 그 시간에는, 꼭 이겨야 16강 진출에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걸 수 있는 상대인 가나에게 졌으니 이제 거의 16강에의 기대는 기적이 아니라면 접어야 할, 적어도 경험과 수치로 따진 예상으로는, 그런 상황이었다. 그 며칠 후에 일어난 일은, 우리 모두가 아는 것처럼, 통계나 수치의 조합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상황, 대한민국 대표팀이 강호 포르투갈에 이기고, 우루과이가 가나에 많아도 2점 이하로 이기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 일어났다. 뭐, 각종 미디어에서 ‘도하(카타르 수도)의 기적’이라고 제목을 붙인 것을 읽으며 “아이구 왠 호들갑!”이라 핀잔을 줄 마음이 전혀 없을 정도였다. 경험한 바에 비추어 보면, 그런 상황에서 잘 일어나기 힘든 일이 일어났으니, 앞으로 우리네 생에서 일어날 어떤 사건의 기적에 대한 적합 정도가 높아진 것이다. 다시 말해, 다음번부터는 기적이라는 용어를 신선하고 적합하게 사용할 수준이 아주 높아진 것이라는 마음이다. 부연하자면, 우리가 브라질을 꺽는 그런 상황에도 기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가 좀 어색할 수도 있다는 추측이다. 교육에 적용하자면, 우리 아이들이 학기 중의 시험이나 퀴즈에서 영 시원찮은 성적을 받았을 때 조차도, 다음 시험을 잘 대비해 열심을 다 하고 기대하면, 기적과도 같이 좋은 성적을 받을 것이고, 그 다음부터는 시험을 잘 봐도 기적이 아닌 실력이 되는 것이다. 나하고는 별 상관이 없던 아주 닳고 닳은 인생의 격언이 우리네 경험 속에서 이루어 진다는 것이다. 2002년에 우리 대한민국 축구팀이 4강에 오르며 우리네 귀에 딱정이가 앉도록 들은 “꿈은 이루어 진다”처럼 말이다.

또 다른 깨달음은, 우리네 인간의 세상사에 대한 인식 능력은 참으로 한정적이라는 당연한 명제에 대한 확인이다. 임마누엘 칸트 이전에 철학자들에게 있어 인간의 ‘인식’은, 즉 어떤 대상을 안다는 것이 우리가 보는 대상에서 오는 감각 정보를 수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칸트는 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안다’는 것은 우리가 대상에서 오는 감각정보를 그대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그것을 우리가 주체적으로 처리하고 종합한 것으로 본다. 그런데 인간이 불완전하니 이 정보의 처리와 종합의 과정 역시 한계를 갖는 것은 우리네 범인의 생각에서도 확실하다. 필자도 잘 모르는 철학을 개념을 논하려는 것은 아니고, 그저 우리네 경험과 기대에서 오는 판단은 얼마나 제한적이고 무의미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일상적인 일의 결과도 완전히 예측할 수 없을진데, ‘기적’의 범주에까지 예측을 할 수는 없는 것이고, 그러한 예측불가능한 일들이 가끔씩이라도 일어나는 것이 인생의 각박함에 단비가 됨도 얼마나 은혜가 되는 지? 여기에서 ‘은혜’란 우리가 객관적으로 보아 받을 자격이 없어도 받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기독교에서 하나님이 용서를 받을 자격이 없는 인간들에게 조차도 대가없이 주시는 그 행위를 말한다.

이 칼럼을 애독자께서 읽으시는 시점은 막 미국 대학들의 조기 전형 합격자 발표가 시작되는 때이다. 합격자 발표의 결과는 세가지로 나뉜다. 합격, 불합격과 합격 유예 (deferred)이다. 한 참 추워지기 시작하는 이 때에, 합격 편지를 받은 학생들은 추위를 잊고 어딘가로 나가 만세라도 부르며 “꿈은 이루어 진다”를 삼창이라도 하고플 것이다. 불합격이 된 학생들은 우리가 가나에 패한 듯한 상황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포르투갈과 나아가 브라질이라는 최고 명문팀/대학과의 결전을 할 수 있는 정시 모집이 아직 남아 있으니 차분히 마음을 다 잡고 다가오는 정시 모집 대학에 원서를 제출하면 된다. 그리고 합격은 되지 않았지만, 불합격시키기는 아까운 지원자들은 불합격을 유보하고, 정시 전형으로 원서를 넘겨 다시 한 번 사정을 받도록 하는 것을 합격 유예라고 부른다. 이 경우에는 원서를 제출한 후에 이룬 업적이 있다면 지원 학교측에 업데이트하는 것이 정시 합격에 당연히 도움이 된다.

또한 12월말과 1월 초경에는 많은 사립 대학들의 조기 전형 두번째 라운드 (Early Decision II)와 대부분의 명문 대학들이 정시 전형 원서 접수를 마감한다. ED2라고 간략히 부르는 이 두번째 얼리 디시전은 첫번째 것과 조건이 동일하다. 필자에게 이제 한 시간 뒤로 다가 온 브라질과의 16강 전에서 혹시 이기지 못해도 다음 월드컵을 기약할 수 있는 것처럼, ED1에서 합격하지 못한 학생들은 이 라운드를 전력을 다해 준비해 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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