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way 교육 – “자녀 교육에 있어 message discipline”

지난 주말에 우리 지역 한인 교회들 중의 하나인 형제 교회의 중고등부 학부모님들을 위한 대입 세미나에 초대 받아 화상 강연을 진행했다. 교회의 학부모님들을 위한 강의라 기독교적인 내용들도 있으나 다른 독자분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에 여기 지상 연재한다:

형제 교회의 중고등학생회는 ‘코람데오’와 ‘넥스트’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라틴어로 코람 (Coram, in the presence of)과 데오 (Deo, God)가 합쳐진 말로서,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다. 여러분 자녀들이 인간 앞에서 그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하는 자가 아니라, 신이 자신의 앞에 있으니 만사에 조심하고 신실하게 행동하려 노력할 터이니 얼마나 귀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

먼저 이 아이들을 교육함에 있어, 그들의 정체성을 확립하도록 돕는 것을 제안한다. 필자는 우리 자녀들이 ‘Korean American Christian (다른 종교나 믿는 대상이 있다면 마지막 부분을 대체하면 되실 것임)임을 마음에 새기고 자신들의 삶을 살아 가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부모들의 조국인 한국과 그들의 생활 무대인 미국의 장점들을 배우고 익혀 자신의 삶 속에서 구현해 나가야 할 것이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출생을 규정하는 국적보다 자신의 영적인(spiritual) 시민권을 적극적으로 깨닫고 행사함일 것이다. 자신의 종교에서 말하는 진리들을 열심히 탐구하고 그 도를 깨달아 삶 속에서 실천함이 최선의 인생살이가 아니겠는가?

이러한 자녀들을 양육하는 우리 부모님들의 전략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를 나누겠다. 성경에서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님의 교훈(training)과 훈계(instruction)로 양육하라 (에베소서 6:4)”고 가르친다. 이 교훈의 포인트는 우리 부모들이 자녀를 교육함에 있어, 하나님의 방식이 아닌 우리 자신의 의지와 뜻을 고집하면, 아이들을 노엽게 하며 교육의 효과가 반감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니, 우리 자녀에게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양육하는 것이 최선이다.

방법론으로는, 요즘 흔히 유행하는 ‘message discipline(메세지 전달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한 정련된 메시지)’의 요령을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고했다. 정치나 경제의 영역에서 정치가가 대중에게 자신의 철학을 설파할 때에, 또는 경영자들이 자신의 제품 등을 소비자들에게 알리며 설득할 때에, 꼭 지키면 효과를 극대화 할 수 있는 원칙 세가지가 있다. 첫째는 일관성 (consistency), 둘째는 관계성 (relevancy), 세번째는 자기 조절 (self-control)이다.

먼저, 자녀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할 때에, 일관성 있는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 부모의 기분이 좋을 때는 자녀의 감정과 사정을 충분히 고려해 온갖 배려와 친절을 베풀다가, 직장이나 사업에서 사소한 나쁜 일의 영향이 자녀 교육의 현장에서 증폭되어 벼라별 악담을 퍼부으시는 경우가 종종 있다. 거의 대부분의 부모님들이 의식하지 못하시고 범하는 잘못이다. 데이빗 폴레이가 출간한 뉴욕 타임즈 베스트 셀러 ‘쓰레기 트럭의 법칙 (The Law of the Garbage Truck)’에서 잘 지적된 것처럼, 자신의 마음에 온갖 쓰레기가 가득찬 어떤 사람이 자신의 마음에 가득찬 원망, 절망, 실패와 회한의 쓰레기를 쏟아 버릴 대상을 찾는다. 그야말로 운이 없게도 내가 그의 옆에 우연히라도 있게 되어 쓰레기를 쏟아 부을 대상이 되었을 때, 그것을 받아 내 마음에 담으면 나도 쓰레기 트럭이 된다. 그리고 그것이 마음에 가득차면 어딘가 버릴 곳을 찾게 되고, 기회를 만나면 그 대상이 아내이든 자식이든, 친구이든 동료이든, 길거리의 모르는 사람에게든 거침없이 쏟아 버리게 된다. 이렇듯, 쓰레기를 자녀에게 비우게 되면, 갑자기 몰려 드는 후회로 부모님들은 번민한다. 그러면, 기대 이상으로 잘 해주고. 이 비움과 채움의 때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 부모님의 태도와 행동은 우리 자녀들이 부모의 진실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최악의 요소이다.

위의 일관성을 메시지 전달에서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자기 조절’의 능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녀에게 쿨하게 대하는 것은 부단한 노력과 의지가 요구되는 일이다. 이러한 자세를 견지하기 위해서는 기독교인이라면, “항상 기뻐하며,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데살로니가 전서 5:16-18)” 마음을 유지한다면 가능할 일이리라. 왜냐하면, 그러한 태도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현재 지적하는 일과의 ‘관계성’도 역시 중요하다. 부모님들이 우리 자녀들의 행동이나 태도를 지적할 때, 직접적으로 그 일과는 상관이 없는 일들을 끄집어 내어 혼을 내시는 경우가 많다. 부모님 자신에게 깊은 상처가 된 일들이 아이들을 나무라실 때 고정 레파토리가 되어 등장한다. 어떤 과목의 숙제를 늦게 제출해서 성적이 내려간 경우를 나무라시다가 갑자기 몇 년 전 야구를 하다가 남의 집 유리창을 깬 일을 상기하시고 그 때 유리 값으로 변상하신 액수와 옆 집 아주머니에게 당하신 면박을 떠 올려 지적하신다. 지금의 잘못과는 그리 상관이 없는 이 질책을 듣는 우리 자녀의 마음이, 부모님의 따끔한 지적에 마음을 울려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 하겠다고 순순히 결심을 하게 되겠는가?

이 세가지 모두가 실천하기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야 할 일임은 분명하다. 기독인이라면, 예수님의 생애 속에서 이 세가지가 어떻게 실행되었는지, 불교인이라면, 부처님의 삶 속에서 이것이 어떻게 구현되었는 지를 깊이 생각하고 그 도를 깨달으면 가능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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