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way 교육 – 찾아 보면, 누구에게나 감탄할만한 면이 있다

요즘은 많은 직장들이 재택 근무를 권장하고, 학교는 온라인 수업을, 교회 마저도 예배를 온라인으로 드리는 경우가 많다. 어쩔 수 없이 꼭 온라인으로 수업을 하거나 모임을 가져야 하는 상황이라면 이것을 긍정적으로 잘 활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필자가 출석하는 교회의 예배 방식이 온라인으로 바뀌면서 수요 예배 시간에 정해진 성경 말씀을 읽고 나누는 시간이 새로이 생겼다. 이전 같으면 목사님께서 성경 말씀을 읽고 그 내용에 연관된 설교를 강의식으로 하시겠지만, 몇 주 전부터 목사님의 제안으로 ‘zoom’ 미팅으로 드려지는 예배에서 성도들이 그 주의 말씀을 같이 읽은 뒤 잠시 생각하는 시간을 갖고 느끼는 바를 서로 나누는 시간을 갖고 있다. 전통적인 예배에서는 생각하기 힘든 방식이 ‘화상 미팅’ 형식으로 인해 가능해 진 것이다.  학생들의 온라인 수업에서도 결과는 마찬가지일 수 있다. 역설적이지만, 보통 대면 수업을 할 때 보다 (컴퓨터 스크린 안에서) 선생님과 더욱 가까이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수업이 더욱 생동감 있고 새로운 깨달음들이 생기지 않겠는가?

     실제로 줌 예배 시간에 의견들을 나누는 경험을 통해, 같은 성경 구절이라도 읽는 이의 문화, 성별, 직업, 미국에 온 햇수 등등, 다른 배경에서 나오는 다른 해석, 질문과 대답을 들었다. 새삼 세상은 참 다양한 사람들의 집단이며 겉만 봐서는 몰랐지만,누구에게나 나름대로 배울 점이 많다는 당연한 이치를 깨달았다. 몇 주전에는 이 시간에 기독교도가 아닌 이들에게도 비교적 잘 알려진 구절을 읽고 각자의 느낀 바를 이야기하는 시간이 있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마태복음 5:10).” 필자는 이 구절을 읽으며 전혀 이상한 느낌이 없었다. 너무나 당연한 내용이 아닌가? 필자가 한국에서 대학을 다닐 적에는 젊었던 우리가 그 당시 옳다고 느끼는 “의로운” 목표를 위해 자신의 젊음을 기꺼이 희생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필자도 그것에 동의했었기에 이 구절이 그냥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어떤 이는 “아니, 왜 우리가 세상에서 의로운 행동을 하는데 핍박을 받아야 합니까? 의로운 것은 칭찬 받아야 마땅하며, 핍박은 복 있는 것과는 아주 동 떨어진 것이 아닌가요?”라고 묻는다. 나름대로 옳은 견해이다. 이러한 논의는 “의”라는 개념의 정의에 따라 다양하게 전개될 수 있고 가끔은 침을 튀기며 감정을 상하게 하는 논쟁으로 발전될 수도 있지만, 어느 것 하나 ‘틀리다’라고 단정할 수 없음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리라.

     이러한 ‘서로 다름’의 인정과 이해가 옳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네 오랜 인류 역사 속에서나, 또는 우리네 작금의 현실 속에서, 매일 끈질기게도 계속되는 현상 중의 하나는 자신 나름의 ‘정의’를 고집하고 남에게 억지로라도 받아 들이게 강제하는, 마음에 안 드는 상대방에 대한 물리적, 정신적 통제 행위, 즉 ‘폭력’의 행사이다. 흔한 것만 보아도, 가정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자녀에 대한 언어와 감정 폭력, 배우자에 대한 유무형의 가정 폭력, 직장내 지위에 기반한 언어및 여타 폭력, 다른 정파간의 이성을 잃은 흠집 내기 등등….

     범위를 좁혀 가정에서 우리 자신도 모르게 행하는 폭력에 대해 생각하다가, 요즘 한국의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는 한 드라마 속의 내용이 생각났다. 서로 사랑해 결혼한 한 커플이 다른 생각과 배경을 극복하지 못하고 이혼을 했다. 이혼 후에, 시간을 두고 지내다가 각 상대방이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최상의 배우자임을 깨닫는다. 다시 합치려고 만나는 장면을 부모에게 들키자 양가의 부모는 이들의 재결합을 극력 반대하며, 폭언을 쏟아 붇는다. 시어머니가 전 며느리의 직장 부근의 찻집으로 찾아 와, “나는 네가 정말 너무나 싫어. 너도 나에게 마찬가지 감정을 갖고 있지 않니? 난 널 절대로 받아 들일 수 없어”라며 쏘아 부치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쌩하니 나가 버린다. “자네를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 내 딸이 가장 힘들 적에 어떻게 그렇게 무심할 수 있었나?” 애써 장인 장모가 운영하는 닭튀김 집으로 용서를 빌러 온 사위에게 ‘절대’라는 말을 되새김 없이 퍼붓는다. 이전에 일어 났던 장면들을 맥락없이 소환해 상대를 무자비하게 질타한다. 드라마의 흐름을 보아, 아마도 해피 엔딩이 되겠지만, 이러한 폭언들이 쉽게 해소되어 서로 애틋한 장모님과 사위, 그리고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될 것인지 궁금하다.

     아내와 드라마를 보면서, “아니 아무리 화가 나도 어찌 저렇게 무식하게 폭언을 퍼부을 수 있어?” “정말 한국 드라마 속의 부모들은 왜 이리도 감정을 자제할 줄 모를까?” 쌍심지를 돋우며 드라마 속의 인물들을 혼 낸다. 그런데, 드라마 속의 장면들이 자꾸 오버랩되며, 괜히 신경이 쓰여 마음 속의 나에게 묻는다. 혹시 나도 우리 아이들에게 이런 마음을 할퀴며,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말들을 해 온 것은 아닐까? 물론 부모로서 당연히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하며 뱉은 말들이었겠지만, 정말 부모는 아이들에게 이런 말들을 해도 되는 것일까? “공부 좀 해라, 왜 도대체 너는 이렇게 생각이 없니. 커서 뭐가 되려고 이래?” 생각이 있는 부모가 아이에게 쉽게 할 수 있는 말들은 아니라는 생각에 정신이 버쩍 든다.

     인도의 시크 교도들은 세상에서 만나는 누구에게라도 “놀라운 면 (wonder)”이 있고, 이것을 느끼는 것이 “사랑 (love)”의 시작이라고 가르친다고 한다. 우리 아이도 물론이지만, 저 길거리의 초라해 보이는 아이도 그 가정의 부모들에게 내 자녀 만큼이나 귀한 아이들이고, 그들이 하는 작은 일도 우리 아이가 한 착한 일만큼이나 귀한 일임을 깨닫는 것이 우리 주위의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는 첫 걸음이라고 한다. 수긍이 가는 가르침이다. 성경에서도,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 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 주심이라 (마태복음 5:44-45).

악인과 선인이 다 같이 밝은 빛과 때맞춘 비를 향유할 하나님의 자녀라면,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우리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우리 형제, 자매들이니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인종간, 종족간, 하물며 가족간에도 행해지는 온갖 유무형의 폭력 대신 남을 내 몸처럼 여기는 사랑을 실천하면,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줄 미래는 정말 살만한 신세계가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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