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지나다 고양이를 보시거든 사랑스레 쓰다듬어 주세요.

21 세기를 미국에서 살아 가는 한인 부모로서, 가치의 상대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 속에서 우리 자녀들을 참되게 교육하기 위해, 그리고 우리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귀감이 되는 삶을 살기 위해, 즉 ‘더 나은 삶을 위해 어떤 방향으로 목표를 정하고 어떤 방식으로 실천해 나가는 것이 바른 길일까?’라는 문제를 생각해 보지 않은 분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 문제의 답을 도출해 나가는 작업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되는, 조던 피터슨 교수의 “12가지 삶의 법칙 (12 Rules for Life: An Antidote to Chaos)”을 독자와 같이 읽어 보며, 본 필자의 생각을 가미해 나눠 보는 시리즈를 작년 11월 초부터 시작했다. 한 법칙, 한 칼럼의 형태로 간략히 줄여 소개하고 있는데, 오늘은 대장정의 막을 내리는 열 두번째 챕터인 “길거리에서 고양이를 보시거든 [사랑스레] 쓰다듬어 주세요 (Pet a cat when you encounter one on the street)”를 같이 읽어 본다.

뉴욕 타임즈가 “현재 서방 세계에서 가장 대중에게 영향력이 큰 지성”이라고 극찬한 피터슨 교수의 마지막 열두 번째 챕터는 앞선 챕터들 내용의 기저에 흐르는 ‘삶은 비극이다’라는 명제에서 출발해 ‘그러면 이 험난한 인생의 바다를 어떻게 현명하게 헤쳐나갈 수 있을까? 아니 보다 간단히 말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을 제공한다.
비극적인 삶을 대응하는 방식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의 태도는 이러한 고난에 대해 증오를 품는 것이다. 이제 좀 살만해 지시자 자격 충분한 쉼을 즐기시기는 커녕, 암을 얻으셔서 사경을 헤매는 어른, 네온사인이 번뜩이는 시내의 모퉁이에서 어김없이 만나는 홈리스들의 추위에 떠는 모습, 다른 인종은 우리와 다른 짐승이라는 태도에서 발생한 린치, 전쟁의 여파로 모국을 떠나려고 콩나물 시루처럼 항해하는 배에 올랐다가 그것이 뒤집혀 익사한 가족의 사체를 해안가에서 발견하곤 부둥켜 안고 통곡하는 이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선한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세상을 허락하시겠는가’라며 증오와 경멸의 마음을 품는다. 이러한 마음에서 컬럼바인 고등학교의 총기난사 사건이, 버지니아텍의 총격 사건이 비롯된다.

다른 방식은 ‘비극적인 삶을 피할 수 없다면 다른 대안이 무엇일까’를 모색하는 것이다. 위에 언급한 비극들에서 기인하는 괴로움에서, 즉 실존적으로 견디기 힘든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피터슨 교수에 의하면, “깨달음”이다. 그 자신이 퇴행성 신경질환으로 극심하게 고통받는 사랑하는 딸을 보며 깨달은 것은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게 아니라, 바로 그 한계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다”라는 깨달음이었다 한다. 그러한 깨달음에서 얻은 실질적 삶의 태도 중 하나는, 인생의 힘든 순간들을 지날 때, 시간 단위를 아주 짧게 끊어서 생각하는 것이다. “다음주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막막하면 우선 내일만 생각하고, 내일도 너무 걱정된다면 1시간만 생각한다. 1시간도 생각할 수 없는 처지라며 10분, 5분, 아니 1분만 생각한다.” 사람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하기에 지금 눈 앞에 놓인 문제를 마주할 용기를 낸다면 생각보다 더 많은 것들을 견딜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힘들고 어려울 때, 아주 사소한 것들에서 아주 사소한 아름다움을볼 수 있어야 한다. 요즘 흔히들 말하는 ‘소확행’과도 통하는 제안이다. 잠시 잠깐이라도 아주 사소한 일에서 확실한 행복을 느끼는 삶의 태도가 실존적인 인간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준다는 것이다.
독자께서 크리스챤이시라면, 아마도 다음의 성경 구절을 이미 떠 올리고 계실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마태복음 6장 34절). 이 구절이 나온 대목은 예수께서, 산상수훈으로 제자들과 모인 군중들에게 삶 속에서 직면하는 많은 어려움(복, 율법, 분노, 보복, 원수 사랑, 재물, 근심, 걱정 등)을 해결하는 방법과 태도를 이야기한 일련의 설교의 일부이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의와 나라를 먼저 구하면, 의식주를 비롯한 인생의 모든 근심과 걱정을 해결해 주실 것을 약속한다: “공중의 새를 보아라.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으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 너희는 새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그러나 이 축복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즉 하나님의 천국과 진리를 믿으라고 먼저 명령하시고, 그런 이들에게는 모든 미래의 일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음을 알려 주신다. 피터슨 교수의 지적처럼, “어떤 역경에도 굴복하지 않고 인내하려면 절대자의 선한 면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 선한 면을 보지 못하면 삶의 방향을 완전히 상실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아내의 잔주름진 손등에도 불구하고 잔잔하게 웃어 주는 그 미소에서 첫 만남의 기억을 되살리며, 멀리 떨어져 있는 딸 아이의 남자 친구에 대한 자랑에서 살짝 생긴 질투가 따뜻한 사랑으로 변하며, 한국에 계신 어머님을 방문하며 오랫만에 뵌 어머님의 굽으신 허리가 아름다워 보이는, 지금은 나이가 먹어 어슬렁거리는 애완견의 느릿한 걸음걸이를 따라하는 손녀의 뒤뚱거림을 보며, 가끔 들르는 커피집의 신선한 그 향이 고단한 삶을 잊게 만드는 그런 소소한 기분 좋은 행복으로 인해 고단한 삶을 잠시 잊고 긴장을 잠시라도 풀 수 있지 않겠는가? “피터슨 교수의 이번 챕터의 제목이 바로 여기에 있다: “길을 걷다가 고양이와 마주치면, 존재의 경이로움이 삶에서 피할 수 없는 고통을 보상해 준다는 것을 잠시나마 떠 올려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길에서 고양이를 보시거든 [사랑스레] 쓰다듬어 주시길.” 고양이도 그렇거늘, 우리 자녀들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오늘 저녁 밥상에 둘러 앉은 아들 딸 아이들을 보시며, 모든 시름이나 나쁜 성적 잊고 기쁜 시간 보내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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