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이 필요없는 경기

매년 이맘 때가 되면 필자의 가족은 온 가족이 함께 모이는 시간을 갖는다. 동부에서 학교를 마치고 보스톤과 뉴욕에 헤어져 직장에 다니던 딸과 아들 녀석이 필자의 학원이 여름 프로그램을 시작하기 전에 잠깐이라도 들러서 애비를 돕겠다는 갸륵함에 고마운 마음이지만 한편으로는 아이들이 휴가를 내서 일을 도와 준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하다.
미안한 마음도 잠시 워낙 친구와 운동을 좋아하는 성격의 아들 녀석이 며칠 아빠를 돕는다고 얼쩡거리더니, 주말이 되면 근처의 레드몬드에서 열리는 팟라치 얼티미트 프리스비의 전국 대회에 참가하러 간다며 캠핑 도구를 주섬주섬 챙길 것이다. 프리스비란 어느 계절을 막론하고 성행하는 운동이지만, 특히 여름에 주변의 학교 운동장이나 파크를 지나가시다가 보면 웬 플라스틱 접시 같은 것을 던지고 받으며 남녀가 어울려 열심히 땀을 흘리며 뛰어다니는 게임을 보신 적이 있으실 것이다. 이 스포츠를 얼티미트 프리스비 게임이라고 부른다. 작년의 일이다: 젊은 아이들만 있어 우리 부부같은 노땅은 잘 어울리지 않는다며 극구 오지말라고 말리는 것을 무릅쓰고 작년에 이어 올 해도 아들 녀석이 시합에 참가하고 있는60 에이커 파크를 찾았다. 새마미시 리버 트레일에 가깝고 우든빌과 마주한 레드몬드에 있는 이 이름처럼 광대한 운동장/공원에는 수많은 인파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미국의 전역에서 온 얼티미트 게임의 마니아들은 물론이고, 한국을 비롯한 (태극기를 흔드는 선수를 보고 짐작컨데) 세계 각국에서 온 외국인 선수들까지 모두 천여명이 어우러져 게임을 즐기는 모습은 수십개의 운동장 주변에 쳐진 텐트와 어우러져 축제 분위기를 펼쳐 보이고 있었다. 여기 저기 펼쳐진 형형색색의 텐트들은 어림잡아도 수백개에 달하는 듯 싶고, 게임이 없는 때에 이곳 저곳에 몰려 앉아 시끌벅쩍 이야기를 나누는 젊음의 웃음 소리들, 잔디밭 위에서 프리스비를 쫒아 전력으로 질주하느라 땀범벅이 된 참가자들, 이 모든 광경은 청춘을 예찬하는 시인들의 싯귀보다도 훨씬 청춘스러운 모습이었다.
애비를 대신해 딸이 운전하는 차 속에서, 작년에 같은 시간에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잠이 들었다: 아들 녀석으로부터 우리에게는 그리 익숙하지 않은 얼티미트 프리스비 선수 또는 애호가들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운동에 열중하느라 휴대 전화나 지갑 등등의 소지품들을 잃어 버린 아이들이 꽤 있었어요. 걱정을 했는데, 분실물 보관소엘 가니까 다 있는 거예요. 정말 기분 좋은 그 느낌 아시죠?” “프리스비하는 아이들을 만나면, 그냥 마음이 진심 통하고 좋은 친구라는 느낌이 확 오는 것 있죠.” 자신이 좋아하는 운동과 같은 운동을 하는 동료들의 정직함과 순수함에 경의를 표하는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동감을 표하며, ‘프리스비’는 ‘프리 스피릿’을 가진 사람들의 운동인 것같다며 아재 개그로 진심의 맞장구를 쳐주자 이 녀석 한참 들뜬 음성으로 얼티미트 프리스비에 대한 예찬론을 장황하게 펼친다. 프리스비라는 이름은 초기에 이 플라스틱 접시를 팔던 한 장남감 회사가 자사 제품에 부친 고유 명사인데 이것이 자연스레 이 운동 기구를 통칭하는 이름이 되었다 한다 (마치 클리넥스 티슈처럼). 그러므로 이 게임의 정식 이름은 프리스비 게임이 아니라 얼티미트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하단다.
“그런데 이 게임의 이름 ‘얼티미트 (Ultimate)’는 뭘 뜻하는 거니?”라는 물음에 아들 녀석은 기다렸다는듯이, 신이 나서 대답을 한다. “그걸 설명드리기 전에, 우선, 이 얼티미트 게임에는 심판이 없어요. 그걸 아셨어요?” 남자들의 대화에 별 흥미가 없어하던 딸 아이와 아내가 놀란듯이 정색을 하고 묻는다. “아니 심판이 없는 게임이 어디 있어, 그럼 어떻게 게임이 잘 진행될 수가 있나?” 고교와 대학에서 라크로스를 했던 딸 아이의 아니 우리 모두의 공통된 의문이었다. 아들 녀석, 신이 나서는, “그러니까 이 게임을 얼티미트라고 부르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신사의 게임, 누가 규율을 억제하지 않아도 선수들 개개인이 잘못(파울)을 범했다면 인정하고 공격권을 내주는, 그야말로 우리 인류가 가질 수 있는 최종(얼티미트)의 게임이라는 말이지요” 하며 자랑을 한다.
우리 자녀들이 대학을 가고 시간이 지나면 졸업을 하고 사회에 진출할 것이다. 이 아이들이 얼티미트 게임을 하듯이 사회 생활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만일, 우리 가정에서부터 이런 게임을 하듯 서로를 존중하고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회개하는 버릇을 키워 나간다면, 왜 이런 사회가 우리 아이들의 세대에라도 도래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정신을 요즘 읽은 신약 성경 구절에서도 발견하고 기뻣다. “2000년 전에도 이런 마음이 있었구먼?” 무엇인가 하면,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라 (…serve one another humbly in love). 이렇듯 서로를 위해 섬기는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 간다면, 무슨 다툼이 있을 것이며, 심판이나 재판관이 왜 필요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