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을 돌아 보며

지난 일요일은 크리스천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기념일인 부활절이었다. 필자의 칼럼이
교육 문제를 주제로 하고 있기는 하지만
, 아주 가끔씩은 우리네 삶 속에서 맞닥뜨리는
사념적인
(또는 종교적인) 문제들도 다루었으면 하는 소망이 있었는데, 이번주에는
때맞추어 기독교에서 말하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에 대해서 한 번 나눠
보기로 한다
.

많은 분들이 기독교의 교리나 가르침에 대해 이미 알고 계시지만, 전혀 알 기회가
없었던 분들을 위해 간단히 부활절에 이르는 제반 사건들의 개요를 소개한다
. 다만,
필자는 기독교 신학을 공부한 전문가도 아니고, 이 칼럼이 자세하고 정확한 교리를
설명하는 자리도 아니니 혹여 무식자의 실수가 있더라도 이해해 주십사 미리 양해를
구한다
.

기독교는 유일신인 하나님을 믿는 종교이며, 이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누구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으로 보통 바이블이라고
불리는 성경이 있는데
, 구약과 신약으로 나뉘어져 있다. 구약은 하나님의 아들인
(또는 하나님 자신이기도 하신이 문제는 다른 자리에서 다루도록 한다) 예수님
이전의 역사를
, 신약은 예수님의 탄생 이후를 다룬다. 이것은 아시는 바와 같이
예수의 탄생을 기점으로 우리는 역사 속의 년도 구분을
B.C. (Before Christ) A.D.
(Anno Domino; In the year of our Lord)로 사용하는 것과도 관계가 있다.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차차 나누기로 하고, 오늘은 어떻게 그리고 왜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돌아 가시고 삼일만에 다시 살아 나셨는지에 대해 간단히 살펴
보기로 한다
. 신약에 나오는 것처럼, 예수님은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 세상에
태어나시고
(즉 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시고 난 후) 삼십년이 지난 후부터야,
하나님의 말씀을 땅에서 전하기 시작하셨다. 이전까지는 가업인 목수의 일을 하며
지내신 것으로 성경은 전한다
.

생애 후반의 3년간 셀 수 없을 만큼의 기적을 일으켜 병자를 치료하고 말씀을
선포하는 일에 전력하셨는데
, 생애 마지막 해의 이맘 때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사건이 일어났다
.

그 사건의 개요를 성경에 무지한 필자의 눈으로나마 간략히 살펴 보자: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당신을 섬기는 민족으로 선택하셨고
,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하는
고난을 겪게하신 후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한 땅인 가나안이라는 지역으로 모세라는
걸출한 지도자를 통해 인도하셨다
. 이 이동의 경로 중에서 하나님은 이 민족에게 죄를
용서받는 방법에 대해서 알려 주셨는데
, 사람이 죄를 지으면 대속물
(양이나 소 등과 같은 제물)을 죽여 제사로 드려야 속죄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예수님의 때가 되자, 이스라엘 민족을 비롯한 인류의 죄는 극에
달하고 미리 구약에 예언된 대로
,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세상죄를 지신 어린양처럼
제물로 죽으므로 인간의 죄가 대신 속죄 받을 수 있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

필자는 독자들께서 이런 성경에 나온 지식을 전달하는 일에 있다기 보다는 오히려
그 역사적 사건의 주변에서 일어난 인간들의 몇가지 고약한 행태를 밝히고 그것에
대해 깨달아 보고자 하는 일에 관심이 있다
.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며칠 전 일요일에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 가셨다
. 그 때 이천년 전 유대땅의
백성들은 이미 예수님이 보리떡 다섯개와 생선 두마리로 오천명 이상을 먹이셨고
,
삼십팔년간 중풍으로 고생하던 자를 말씀 한 마디로 고쳤을 뿐만 아니라, 죽은 자도
살리신 기적의 소식들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 그래서 당연히 그 군중들은 이 분이
그들의 모든 세상적 욕망을 채워주고
, 모든 질병으로부터 자유케하며,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 줄 메시아로 확신했었을 것임이 틀림없다
. 그러니
예루살렘에 비록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예수일지라도
호산나”(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
호산나를 외치며, 그들 최고의 예우로 자신들의 겉옷을 펼쳐 가시는 길 위에 깔고,
종려 나무 가지를 흔들며 열렬히 환영했던 것이다.

하지만, 단 며칠이 지난 그 주 금요일에 당시의 종교, 정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신성 모독을 범한 거짓 선지자로 매도하여 십자가에 달아 죽이라고 백성을 선동하고
며칠 전의 함성이 허공에 아직도 메아리치고 있음에도 그들은 다시 외친다
:
그를 죽여라. 십자가에 매달아라 (당시의 십자가 형벌은 가장 파렴치하고 악독한
죄인을 매다는 사형 도구였다
). 당시 법 집행자였던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을 채찍으로
치고
, 창으로 찌르며 마침내 십자가 위에 달아 죽였다. 성경은 이 사건이 일어나기
8백여년 전에 이렇게 예언했다. 요약해 인용하면, 그가 찔리고 상함은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이요. 그가 징계를 받고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나음을 받았다.”

그렇다. 그분의 죽음으로 우리는 죄 사함과 평화를 얻었다. 그 고마움을 상기하며,
예수님이 죽은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 나신 그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며 부활절 행사를
가졌다
. 하지만, 올해 부활절 예배를 보며 떠오른 생각은 이천년 전 유대땅에 살던
그네들이나
, 지금 이 신앙의 자유가 있는 미국땅에 사는 우리네의 삶의 행태가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 비록 성경을 읽으며 그 구세대들의 소갈머리 없음을 비난하긴
하지만
, 우리 자신도 되돌아 보면, 자신의 욕망을 채워줄 그 무엇은 그리도 찬양하지만,
조금이라도 이용가치가 없어지면 그 누구라도 죽음에라도 내모는 그 몰염치함이
느껴진다
. 앞으로는 예수님의 죽음에 죄송한 마음을 느끼고 염치 있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는 부활 주일 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