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르네상스 – 전성기 르네상스의 영웅들2

미켈란 젤로

지난주에 이어서 전성기 르네상스 시대 또 한명의 거장인 미켈란 젤로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고 한다. 미켈란젤로는 어려서 유모의 손에 키워 졌다고 한다. 이 유모의 남편은 그 당시 석공이었는데, 이러한 연유로 그는 어릴때 부터 조각과 소묘등 미술과 가까워 질 수 있었으나 그의 가족들은 조각가가 되고 싶어하는 그에게 보다 존경받는 직업을 갖기를 강요했다. 그런데 메디치 가문의 로렌조는 미켈란 젤로의 재능을 알아보고 15세 에 피렌체로 데리고 와서 수양아들로 삼았다고 한다.

미켈란 젤로는 누구보다 더 예술가의 위상을 높인 인물이다. 창조의 재능은 신으로 부터 부여받은 것이라는 믿음으로 미켈란 젤로는 모든 관습을 깨트렸다. 숭배자들은 그를 신성한 사람으로 불렀을 정도였지만 그 댓가는 고독 뿐이었다. 그는 늘 혼자였던 것이다.

또한 미켈란 젤로는 제자를 두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작업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미켈란 젤로에게 결혼을 하지 않아서 후계자가 없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하자 “나에게는 끊임없이 나를 들볶아 대는 예술이라는 마누라가 있고 내가 남긴 작품이 나의 자식들이오.” 하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그는 매우 격정적이고 강직 했으며 거침없이 행동 하였고 오직 채석장에 있을 때나 작업을 하고 있는 때에만 행복해 했다고 한다.

미켈란젤로는 건축가, 화가, 조각가, 공학자로 활약했을 정도로 매우 광범위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산 전체를 거대한 조각품으로 만들려고 계획한 적도 있었던 그는 약 90세까지 장수 했으며 죽기 직전까지도 조각품을 손질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 그는 “이제야 조각의 기본을 조금 알 것 같은데 죽어야 하다니…. “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미켈란 젤로는 모든 예술가 가운데에서 조각가가 가장 신과 가깝다고 믿었다. 왜냐하면 신이 진흙에서 생명체를 창조했듯이 조각가 역시 돌에서 미를 끌어내기 때문이다. 그는 조각을 대리석안에 갖혀 있는 인물을 해방시키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다른 조각가들이 실수한 부분을 다른 대리석 조각에서 뜯어 맞추어 눈가림 하는 것에 비해 미켈란 젤로는 언제나 한 덩어리로 조각을 했었다고 한다. 그에게 명성을 안겨준 첫 작품은 23살에 조각한 ‘그리스도의 죽음을 애도함’이라는 의미의 <피에타>이다. 피라미드 구도는 레오나르도에게 배운 것이고 성모 마리아의 평온한 얼굴은 그리스 조각의 사실적인 표현을 보여주며 해부학적으로 정확한 예술적인 신체구조는 시체의 해부를 통애 얻어진 것이라고 한다. 이 작품은 미켈란젤로가 작품에 사인을 남긴 유일한 작품이기도 하다.

화가로서의 미켈란젤로는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에 인류의 탄생과 죽음을 표현한 340여개의 인물상을 그려 넣어 르네상스 시대를 통틀어서 가장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 내었다. 제자 한사람도 쓰지 않고 오직 혼자서 4년만에 완성 해낸 이 작품이 <천지창조>라는 천장화 이다. 회화를 조각보다 한 단계 낮은 예술로 보아 경시 하였던 미켈란젤로이지만 이 천장화는 실제 세계가 아닌 그의 상상력에서 비롯된 것으로 형상미술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일찌기 누드화가 이토록 거대한 스케일로 표현 되었던 일도 없었으며 29년후 그는 같은 성당의 벽에 <최후의 심판>을 그리게 된다. 이 그림은 예수를 자비로운 구원자가 아니라 엄정한 심판자로 묘사를 하였고 전체적인 분위기도 매우 위압적이어서 완성작을 본 교황 바울 3세는 무릎을 꿇고 “주여 내 죄를 용서하소서!”라고 외쳤다는 일화도 있다.

J Art Academy

원장 이준규


피에타 (산 피에트로 대성당, 바티칸)


천지창조 (시스티나 성당 , 바티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