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아파하지 말고다시 시작해

필자가 출석하는 교회에서 요즘 ‘영적 성숙’을 목표로 ‘묵상에 관한 세미나’를 진행해 참석하고 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묵상과 우리에게 보다 친숙한 세속적인 명상과는 무엇이 다른지 궁금해 손가락 품을 팔아 인터넷 이곳 저곳을 뒤져 보았다. 필자의 성향에 따라 아마도 편향되었을 결론을 요약하면, 명상은 내 자신의 마음을 번뇌케 하는 것들을 내 자신의 깨달음으로 비워 버리려는 노력이요, 묵상은 내 마음을 채우고 있는 욕심이나 두려움 등을 하나님의 말씀 등에 근거해 비워 버리고 그곳을 하나님의 성품인 거룩함과 사랑으로 채우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성경에서 두려움은 사랑이 없음에서 생기는 것이요, 욕심은 거룩함과 반한다고 하니 이해가 된다. 이러한 정의의 진위 여부를 떠나, 이러한 노력들이 우리 자신을 억누르고 있는 거짓된 의식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찾으려는 의지적 행위라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아주 조금만 걱정해도 될 일을 지나치게 생각해 그 덩치를 필요 이상으로 키워 그 짐에 억눌려 허덕이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 억누름의 본질을 밝혀 무게를 줄여 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억누름의 살을 빼려는 노력 하나. 세미나에서 목사님의 질문: 아침에 일어 나서 제일 먼저 무엇을 하십니까? 내가 무의식적이고 습관적으로 하는 것들을 돌아 보았다. 예를 들어, 언제부터인가 매일 아침 일어나 비몽사몽간에 하는 첫번째 행동 중의 하나가 이메일을 확인하는 것이 되었다. 나도 모르게 그리 달갑지 않지만 거의 굳어진 일상의 습관이 되었다. 뭐 그리 내세울 만큼 독실하지는 않지만 크리스천인 필자가 그것을 그리 마땅치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잠에서 깨어나 (또는 거창하게 표현하자면, 죽음과도 같은 잠에서 깨어나 부활한 후에) 하는 첫 행위가 다시 살아나 삶을 계속하게 해 주신 이에 감사하는 마음을 표하거나 묵상하는 일이 아니라, 아무 생각없이 다시 세상사의 얄팍한 정보/지식 획득에 나 자신을 바친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러한 세상사와의 첫번째 조우는 우리에게 많은 경우 걱정과 근심을 제공하는 시발점이 된다. 이메일로 배달되는 몇가지 뉴스만 보더라도 그리 행복하고 유쾌한 것보다는 대부분이 암울한 사건 사고 소식임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좋은 소식 또는 나쁘지 않은 소식을 신청해 받는 것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몇몇 사이트를 찾아 구독하고 있다. 이메일 중에 매일 규칙적으로 받는 것들이 있는데, 몇가지만 들자면, ‘word of the day (dictionary.com),’ ‘The Morning (New York Times),’ 그리고 ‘Richard Rohr Daily Meditation (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등등이 있다. 대부분 무료로 받아 보는 기분 나쁘지 않은 일일 정보들인데 (뉴스를 제외하고), 요긴한 것들이 많으니 독자분들께서도 직접 한 번 확인해 보시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 글을 쓰는 11월의 마지막 주는 필자의 직업상 신경이 쓰이고 바쁜 주이기는 하지만, 하루의 시작은 다른 날들과 거의 동일하다. 이메일을 확인하니, 뉴욕 타임즈가 전하는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인질 석방을 위해 휴전을 며칠 더 연장한다는 그리 나쁘지 않은 소식이 있다. 이것을 읽으며, 필자의 직업 의식이 발동한다. 곧 있을 캘리포니아 주립 대학(버클리, UCLA 등이 포함된 University of California)들의 신입생 원서 마감일이 11월30일로 가까워 오고, 아직도 원서를 준비하느라 허겁지겁하는 몇몇 학생들이 떠오른다. 이들은 아마 마감일이 며칠 더 연장되면 얼마나 좋을까 소원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헛된 희망을 겪고 또 겪어 온 어른인 우리는 모두 안다. 우리네 경험으로 체득한 지혜는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으니, 아이에게 지금부터 밤을 새더라도 애써 준비하면 마음도 편해 지고 좋은 결과도 있을 것임을 말해 주면 될 것이다. 이쯤에 이르자 몇 년 전 어느 학생의 체념적인 고백이 떠 오른다. 원서 마감은 다가 오고, 준비는 안 되어 있어 거의 절망적인 이 녀석, “선생님, 만약 원서의 에세이 난을 백지로 내면 어떨까요?” “혹시 굉장히 철학적인 지원자로 판단해 합격시키지 않을까요?” 물론 답답한 마음에 농으로 한 것을 알기에, 꿀밤을 한 대 먹이며, “그래서 각 대학들이 최소 이 정도 길이로는 써야 한다고 정해 놓은 거야 이 녀석아.”

좀 문맥이 다르기는 하지만, 이 ‘백지’ 철학은 오랜 기간 교육자들의 머리를 어지럽혀 온 주제였다. 교육 현장의 ‘백지’라는 표현은 “인간은 ‘백지 상태’로 태어나며, 교육과 경험으로

자신의 인생 그림을 그려 나가는 것”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존 로크와 같은 경험주의 철학자들이 사용하기 시작한 이것의 라틴어 어구가 더 익숙하신 분들이 있으실 것이다. 바로 ‘tabula rasa (blank slate, 빈 칠판, 잘 닦여진 서판)’이다. 즉 인생은 이렇듯 새롭게 잘 닦여 있는 칠판 위에 인간의 오감을 통해 받아 들이고 이해한 내용들을 써 내려 가는 것과 같다는 의미이다.

예술에서도 ‘백지’라는 표현이 사용된 경우들이 있는데, 1951년에 로버트 로샌버그라는 추상 표현주의 계열의 화가가 전 캔버스를 흰색으로 칠해 전시하며 이것을 “white paintings’라고 불렀다. 현재는 샌프란시스코 현대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 그림들의 이면에 표현된 화가의 목적은 “전적으로 순진무구하며 완성된 형태로 세상에 나온 것처럼, 인간의 손 때가 묻지 않은 그림을 그리려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그림 위에 다른 그림을 그리도록 의도되었다고 하니, 위의 ‘인간은 백지 상태로 태어 난다’는 표현과도 통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우리 아이들이 백지 상태로 태어났다면, 그들이 자신만의 아름다운 그림들을 그려 나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우리네 부모들의 역할이리라. 하지만, 우리 모두가 그랬던 것처럼 누구나 실수를 하며 그것이 우리 마음의 캔버스를 어울리지 않는 색과 모양으로 더럽힐 수 있다. 틀렸다고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 깨끗이 지우고 다시 시작하도록 격려해 주면 좋을 것이다. 그러니 예수께서 우리의 더러운 것들을 지워 주시고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 아니겠는가? 마음을 비우는, 지저분한 낙서를 지우는, 명상이나 묵상이 매일 매일 다시 태어나 백지 상태로 다시 시작하려는 노력일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오늘 하루를 다시 시작한다.

| 벨뷰 EWAY학원 원장 민명기 Tel.425-467-6895 ewaybellevu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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