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과 태극기

미국에 산지가 30년이 가까워 오지만, 아직도 저녁 식사 후에 한국의 9시 뉴스를 보는 재미는 쏠쏠하다. 아니,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는 것이 옳다. 요즘은 한국의 뉴스가 나올라치면 서둘러 다른 방으로 가 급하지도 않은 다른 일을 하거나 아예 텔레비전을 꺼버린다. 한국의 정국을 강타하고 있는 최순실의 국정 농단 사태에 대한 당혹감과 실망감, 그리고 이 사태를 진단하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과정에서 서로 물고 뜯는 정치가들이 패거리로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앞세우며 남을 무조건 죄인시 하는 행태가 뭔가 정상적으로 보이질 않고 밉기 때문이다.

몇년전 한국의 교수 신문은 새해 초에 그해에 이뤄질 일들을 기대하는 의미에서 희망의 한자성어로 ‘화이부동(和而不同)’을 선정했었다. 이 말은 논어 자로(子路)편에 있는 ‘군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하고 소인은 동이부화(同而不和)하다’에서 비롯된 것으로 ‘남과 사이 좋게 지내기는 하나 무턱대고 어울리지는 않는다’는 뜻으로 무조건적인 동질성이 아닌 서로의 다름과 차이를 전제로 한 조화(調和)를 강조하는 말이다. 자신과 꼭 같은 동류가 아니면 이해는 커녕, 말도 섞지 않는 패거리 문화, 즉 촛불이나 태극기를 들고 자신과 같은 물건을 들지 않은 것은 무조건 남이며, 남은 무조건 죄인이고 자신만이 옳다는 사람들을 꾸짖는 말이 아닌가 싶다.

서양의 문화계에서 1980년대부터 힘을 얻은 Post-Modernism의 사상이 이전의 흑백 논리가 아닌 개인이나 지역, 인종이나 국가가 각각 다른 것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고도 할 수 있다. 즉, 이것이 아니면 안된다는 (either A or B) 흑백논리가 아닌, 이것도 일리가 있고 저것 또한 가치가 있다는 (both A and B) 논리가 힘을 얻고 있는 것이다. 또한 1960년대의 사회학이 용광로 이론을 주장하여 이민 사회 속에서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각각이 지닌 모든 독특함을 포기하고 용광로 속에 녹아 들어 전혀 다른 종합 문화를 만들어 그 속에서 사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했지만, 얼마전부터는 샐러드 보울 속의 과일이나 야채처럼 또는 태피스트리를 구성하는 씨실과 날실들이 각각의 고유의 색을 유지하면서도 조화를 이루어 예쁜 모양과 색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이 이민사회가 자신의 고유성을 유지하며 서로를 돋보이게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한다는 이론이 더욱 설득력을 갖는 것도 그 맥을 같이한다 할 것이다.

미국땅에서 새해를 맞으며 우리 부모님들과 자녀들 사이의 관계에서 서로가 이런 마음을 가지고 대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우리 아이가 앞집 크리스하고는 생긴 것도 재능도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우리 부모들이 자녀들을 훈계할 때 가장 많이 쓰는 어법은 비교법이다: “아니 옆 집 에스더 누나는 어느 경시 대회에 나가서 상도 받고 공부도 잘해서 동부의 아이비 리그인가하는 대학에 전액 장학금을 받고 간다는데, 너는 어째 그러냐.” “고등 학교 와서는 공부하는 꼴을 못봤다니까. 너 이번 겨울 방학에도 내내 게임만 했잖아. 이래가지고 UW이나 가겠어? 어휴 누굴 닮아서 이 모양인지, 원!” 물론 방학 내내 게임만 하는 아이를 칭찬하라는 말은 아니다. 필자 개인적인 생각으로도 컴퓨터 게임은 게임 이외의 일들에서 집중력을 저하시키고, 조금만 못하게 되면 금단현상처럼 눈이 풀리고 사람을 초조하게 만드는 마약과도 같은 백해무익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장하자면, 종국에는 게임이 청소년들을 망치게 될 것이라는 게임 망국론이라도 주창하고 싶을 정도이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앞집 아이의 이름은 크리스, 옆집 누나는 에스더이지만, 우리 애의 이름은 좐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US News & World Report와 같은 미디어에서 상업적인 목적으로 만든 대학의 랭킹에 세뇌된 부모들이 어떤 종류의 대학이 자녀의 능력과 특성에 잘 맞는 대학인지를 따지기보다는 그저 랭킹 몇 위 안에 드는 대학인지가 또는 뒷 집애가 간 모모 대학의 이름이 대학 선택의 제일 요건이 되어서는 안된다.

오는 1월말 경에 줄줄이 B, C가 적힌 첫 학기 성적표를 받아 오는 아이에게 그 이유를 냉정하게 분석하고 그에 합당한 격려나 위로를 주기 위해 노력해 보자. 부랴 부랴 학원을 보낸다, 가정 교사를 댄다 하며 아이를 잡거나, 컴퓨터와 셀 폰의 사용을 금지하며 갑자기 헬리콥터 부모로 돌변하기보다는, “우리 좐이 과학은 잘했네. 앞으로 과학자가 될 모양이네. 그런데 역사는 좀 이해가 잘 안되니? 어떤 점이 어려워”하고 대화를 해보는 것도 한 방법이리라. 올 해는 대리만족을 위해 무리하게 자녀를 몰아세우거나, 자녀를 너무 사랑함에서 오는 허상에의 집착에서 벗어나 해탈까지는 아니더라도 자녀를 있는 그대로의 능력과 모양의 한 인간으로 보고 그들의 미래를 걱정하며 바르게 설계하도록 도와주며 기도하는, 즉 부모자식간에도 화이부동하는 그런 한 해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