事緣(사연)을 담은 가을 便紙(편지)

[事緣(사연)을 담은 가을 便紙(편지)]

행복과 안녕을 祈願(기원)하는 날

秋夕(추석)에는 옹기종기 모여 않아 소망을 기원하는 가슴들이 송편을 만든다. 울퉁불퉁 만들어진 송편을 바라 보면서 올 한 해의 사연들도 저 모양처럼 제각기 다르지는 않을까. 풍성한 수확을 기뻐하고, 모두가 바쁜 일상을 잠시 접고 주위를 돌아보며 행복과 안녕을 기원하는 그런 기쁜 날 “추석”은 한국적인 아름다운 정서의 문화가 그리움으로 다가 오는 季節(계절)이다.
가을 하늘은 淸明(청명)하고 보름달은 여전히 크고 둥근데 나이가 들수록 사람의 마음은 왜 이렇게 작아지는가 모난 세상에도 둥글게 살고 싶었고 힘든 삶이라도 밝게 살고 싶었건만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생각은 많아지고 왠지 이름 모른 눈물만이 앞을 가린다.

어릴 적 모습은 기억에서 가물거리고 나보다 훌쩍 커버린 자식 앞에서 追憶(추억)에 젖어 들기엔 무거운 현실 부모님께 다하지 못한 孝道(효도)와 자식에게 다해주지 못한 미안 함으로 찬 바람이 불어오면 가슴이 더 아려온다. 살다 보면 좀 나아지겠지 하는 期待(기대) 와 希望(희망)도 다만 기대와 희망일 뿐 올해도 한 잎 두 잎 떨어지는 쓸쓸한 낙 옆 같은 나의 삶은 결코 달관할 수 없고 세상을 결코 이겨낼 수 없다 해도 중년에 남아있는 달빛 젖은 꿈 하나 돌아갈 수 없는 세월이 그립고 살아갈 날은 더욱 허무할 지라도 묵묵히 나의 삶에 (充實)충실하다 보면 언젠 가도 내 마음에도 보름달이 뜨지 않을까 먼 훗날 생의 보금자리에서 환희 비치는 보름달을 다시금 만나고 싶어지는 가을이다.

事緣(사연)을 담은 가을편지

뿌우연 구름 걷히고 말갛게 갠 초가을 하늘이 파란 얼굴을 살포시 내밀며, 골목길가에 제 씨가 떨어져 피어난 여린 줄기의 꽃잎들의 흔들림을 보면서 그렇게 가을꽃이 난무하던 옛 敎程(교정)이 생각나고 친구들에게 소식을 묻고 싶어진다. 집 앞 입구 작은 郵遞筒(우체통)이 앞에 우뚝 서 있지만 쓸쓸해 보이는 우체통을 쳐다보면서, 사랑의 떨림을 사연으로 적고 安否(안부)와 消息(소식)을 한 장의 편지로 주고받던 때를 기억하며 고향의 그리움을 전하고 싶기도 하다. 편지를 받은 것도 오래 되었지만 써 본 지도 오래 되었다.

우편함을 들여다봐도 告知書(고지서)들의 일색이고 弘報用(홍보용)으로 보 낸 책자들이 난무할 뿐 편지 한 통을 만나기 어렵게 되었다. 이제는 모두 편하고 빠른 방법으로 소식을 전달한다. 메신저나 문자 메시지, 이 메일로 대신한다. 바쁜 세상에 일일이 한 글자 한 글자 써야 하는 편지가 번거롭게 생각되는 까닭일까. 하지만 같은 문구로 여러 사람에게 일제히 발송하는 문자 메시지나 이 메일은 편지만큼 정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소식을 통보하는 글일 뿐이다. 곁에 있는 벗에게 얘기하듯, 문안의 글을 적은 편지같이 애틋하지 않기 때문이다.

빠르게 보급된 새로운 문화에 밀려, 편지 쓰는 일도 편지를 붙이는 일도 일상에서 점점 사라져서 空間(공간)과 공간을 이어주는 媒介體(매개체)의 역할을 했던 우체통의 역할이 한가해진 것이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서서 거리의 한 풍경을 장식했던 그 모습을 이젠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내겐 묵은 편지뭉치가 있다. 이사를 여러 번 하면서 살림살이를 정리해 낡고 헐은 것을 내다 버리면서도, 빛 바래고 누렇게 변해 버린 편지들은 버리지 못하고 또 한쪽으로 밀어두곤 했다. 내게 그 많은 사연을 보낸 이들의 따뜻함을 금시라도 만 날것 같은 글월 때문이었다.
내 삶 속에 그리운 이들을 만나보자.

이젠 세상에서 만날 수 없는 아버지의 따뜻한 事緣(사연)도 들어있고, 형제들과 친구들이 소식을 전해온 글발도 담겨 있다. 어머니가 집을 떠나 다른 지방에 잠시 있는 동안 보내온 편지도 있고, 아들들이 직장에서 집과 가족을 그리며 썼던 글들도 남아 있다. 편지 한 장을 꺼내 읽다 보면, 어느새 나는 記憶(기억) 속을 달려 정다웠던 내 삶의 한 모퉁이를 만나 그 공간에 잠시 머무르며 내 삶 속에 그리운 이들을 만난다.

아직 한낮의 햇살은 따갑지만 살갗에 감도는 작은 바람이 사뭇 다르다. 선선하고 쾌적한 기운이 감도는 걸 보면 아무래도 가을이 깊어가려나 보다. “가을엔 便紙(편지)를 쓰겠어요.”평소에 귀에 익었던 노래가사가 어느새 입가에 번져, 노래를 흥얼대며 꽃 편지지를 편다. 그 동안 격조하여 어색해진 고향 친구도 내 편지를 받으면, 매미 소리가 잦아들고 귀뚜라미 소리가 들려오는 가을 뜰에서 아름다운 삶을 꿈꾸며 나누었던 많은 얘기를 떠올리며 나를 기억해 줄런지.

가을 熱媒(열매) 처럼

봄에는 새 살림 차려 신혼의 꽃을 피우고 여름에는 잎사귀 같은 자식들 녹색으로 사랑을 키우다가 가을에는 성숙한 자식들 열매 맺듯 단풍 옷 입혀 시집장가 보내고 겨울에는 마른 가지 두 내외 호젓하게 외롭다가 눈 오는 날 눈꽃에 싸여 잠적하듯 잊혀지겠다고
꿋꿋하게 살아라 당차고 예쁜 것들 아들 딸들아. 실로 오랜 세월 단절하듯 놓았던 펜을 들고 이 가을의 느낌에 몸을 맡긴다. 가을소리 따라 네 엄마의 손맛에 길들여진 너의 입맛이 김치와 만두에서 사박거리는 소리 함께 듣는다. 이제 그리움의 가을 여행. 그리움과 보고 싶음이 아픔이 되고 그 아픔이 마디가 되고 그 마디가 옹이 되어 肉化(육화)된 삶의 일부. 두 손 모아 순종하듯 받아들인 이별 敍事詩(서사시). 이 가을 눈물과 함께 애달프다. 너의 눈물에서도 향기가 나겠지. 그러나 성실하게 성장한 아들 딸들아. 나는 너를 믿는다. 신뢰하는 자에게 보내는 이 아버지의 愛情(애정)이기에.

세상은 꿈꾸는 자의 것이다. 실현 가능한 꿈을 꾸면서 시 <가을 열매>처럼 예쁘고 아름답게 살아보아라 가을 정서를 담아 사랑하는 아들 딸들에게.

< 칼럼리스트 윤상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