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香氣)로운 가을

[향기(香氣)로운 가을]

10월의 향기(香氣)

1857년 저녁 노을이 지는 들녘에서 농촌의 한 가난한 부부가 밭에서 감자를 수확해 바구니에 담고는 조용히 전원에서 감사 기도를 그린 한 폭의 그림- 밀레의 ≪만종≫은 프랑스의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1814~1875) 의 작품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설령 그림을 잘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한 번쯤은 보았을 법한 너무나 유 명한 한 폭의 그림을 다시금 바라보면서 자연을 향한 깊은 철학적 성찰을 느끼며 새로운 삶의 양식으로 다가 오게 하는 10월의 향기라 느껴진다.

14시간 이상씩 일하고 받은 농민들의 저임금은 근로자와 농민의 어두운 시대적 배경이었음 짐작할 수 있어 으며, 근대화의 물결 속에 갈수록 어려워져만 가는 시대적 상황들은 지금 우리가 피부로 느끼는 이야기와 별 반 다르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인가 보다.
깊어가는 가을과 함께 시애틀 하늘을 바라보면서 지난 이민의 삶을 결정하던 날 고향의 향기는 추억 속으로 붙여 버리고 말았다. 석양에 비낀 산마루 의 낙조(落照)만큼이나 고운 단풍과 들녘 산 비탈에 펼쳐지는 수천의 벼 이삭과 수수 이삭이 일정하게 고개를 깊게 숙이고 묵도(默禱)에 빠져 있는 옛 추억의 모습은 어느 집회 에서 느끼는 것보다 더 깊은 경건(敬虔)함으로 마음으로 느끼며 다가왔기 때문이다.

지난 여름의 뙤약볕과 폭풍우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이렇게 보람과 열매를 만들기 위하여 오늘도 고개를 깊이 숙인 붉은 벼 이삭처럼 기도하는 농부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너무도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감사 함으로 들여지는 기도 속에 돌아오는 축복, 승리의 축복, 번영의 축복, 안전의 축복, 밀레가 그린 한 폭의 가난한 농부는 이제 세상 밖에서 가장 행복한 부부, 범사에 감사 함으로 사는 부부의 모습을 상상해 보면서 다시금 나는 늘 밀레의 ‘만종’의 축복을 떠올려본다.

존경에 대한 수요(需要)와 공급(供給)

사람은 누구나 남에게 좀 더 나은 대우와 축복을 받고 싶어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높은 지위를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재물이나 학식, 권력을 더 얻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이 들면 악착같이 그에 어울리는 존경과 대우를 제대로 받으려고 하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 사는 곳에는 늘 존경과 대접에 대한 수요(需要)는 높은데 공급(供給)이 충분히 되지 않아서 일어나는 문제가 한둘이 아니다. “그런 건 졸병들 이나 하는 일이지. 내 계급이 어딘데 그런 시시한 일을 하느냐!” 하는 태도는 군대에만 있는 것이 아닌가 보다. 학교에서도 선배에게 불손했다고 왕 따를 당하는 일이 생기게 되고, 직장 에서도 지위를 이용하여 부하를 괴롭히거나 심지어 성희롱을 하는 일도 심심치 않게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욕심(慾心)을 버려야 산다

미국 미시건 대학교의 스테파니 브라운 박사가 인간의 욕심과 수명에 관한 연구를 했다. 연구 결과 일반적인 경우의 사망률을 1로 봤을 때 욕심이 많은 사람들의 사망률이 1.2인데 비해, 욕심이 적은 사람의 사망률은 0.43에 그쳤다고 한다. 욕심의 많고 적음이 수명에까지 영향을 준다는 놀라운 결과이다.

흔히 세상 사람들은 욕심이 삶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다고들 한다. 욕심이 성공의 조건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 1724~1804)의 이야기에서도 엿볼 수 있다. 청년들에게 “욕심을 과감히 거부하라”고 충언한다. 욕심이 인생의 성공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라는 것이 칸트의 생각이었다. 과연 감사가 없는 욕심은 성공의 조건일까? 성공의 장애물일까?

욕심은 인생의 패배자(敗北者)

욕심이 우리 삶을 어떻게 이끌어 가는지 그 길을 살펴보자.
(첫째) 욕심은 결실을 방해한다-유대인의 지혜서 탈무드(Talmud)는 “승자의 주머니 속에는 꿈이 있고 패자의 주머니 속에는 욕심이 있다”고 했다. 사람들은 욕심 때문에 성공하고, 욕심 때문에 행복해지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욕심은 인생의 패배자를 만들뿐이다. 욕심으로는 어떤 결실도 맺을 수 없다.
오히려 욕심을 버릴 때 우리의 인생은 더 큰 결실을 맺게 된다. 록펠러가 좋은 예이다. 신앙심이 깊었던 어머니로부터 사회를 위하여 봉사하라며 철저한 신앙 교육을 받으며 자란 록펠러. 그는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온전한 나를 버린 중심의 삶을 살았다. 그 결과 세계에서 가장 큰 리버사이드교회를 비롯해 4,928개의 교회를 건축하였으며, 시카고 대학 등 12개의 종합대학과 12개의 단과대학 및 연구소를 지었다. 그리고 이를 다시 사회에 기증하는 모범을 보였다. 그가 이룬 성공의 결실은 욕심을 버린 대가였다. 그가 욕심을 부렸다면 이 같은 결실을 맺을 수 있었을까?

(둘째) 욕심은 다툼을 만든다-사람들이 다투는 모습을 자세히 지켜본 적이 있는가? 어떤 다툼이든지 그 원인은 서로의 욕심에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화합을 원한다면 욕심은 자제해야 한다. 아주 작은 불꽃 하나가 산불을 내듯 작은 욕심의 불씨가 큰 다툼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에서 벌어지는 쌍용자동차 사태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불법 노조원들은 당장의 욕심 채우기에만 급급한 나머지 회사가 파산의 길로 들어설 수 있는 상황조차 무시해버렸다. 그 결과 파업으로 손실된 금액만 자그마치 3,000억 원에 이른다. 뿐만 아니라 이번 사태로 인한 쌍용차 브랜드의 이미지 손상은 회사의 회생 자체를 불투명하게 만들어 버렸다. 결국 남은 것은 회복하기 힘든 상처뿐이다.

이처럼 욕심으로 찌든 우리의 삶은 다툼과 비방으로 얼룩질 수밖에 없다. “욕심은 우리 마음을 검게 태우는 다툼의 불꽃”이라 했던 프로이트(Sigmund Freud ; 1856~1939)의 말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욕심에 이끌리는 사람은 삶 속에서 귀한 결실을 얻을 수 없다. 다툼이 끊이지 않을 뿐 아니라, 감사의 응답도 받을 수 없다. 그러나 욕심을 버린 삶은 이 모든 것을 회복하는 축복의 삶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욕심에 이끌릴 때 밀레의 작품 속에 나오는 가난한 부부를 바라보라. 과연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이었을까? 내 안에 보이지 않던 또 다른 힘의 도우심으로 어려워져 가는 경제적 위기도 축복으로 이어질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 칼럼리스트 윤상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