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숨겨진 힘!

내 안에 숨겨진 힘!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누구인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 B.C. 384~322)가 제자들에게 물었다. “돈이 없는 사람 입니다.”, “병상에 누워 있는 사람입니다.”, “부모가 없는 사람입니다.”, “남편이 없는 사람입니다.” 제자들의 답이 이어졌다. 그러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보람된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6명 중 1명 꼴로 백수 가장인 우리 사회,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일할 의지마저 잃어버린 청년들 일명 니트족 (NEET)은 이미 100만 명을 넘어섰다. 경기 침체로 일자리가 부족한 것은 사실이지만, 좋은 조건의 일만 하려 는 사람들의 안일한 생각도 실업률을 높이는 원인이 되고 있다. 그러나 마음가짐을 조금만 달리하면 일이 주 는 기쁨과 보람을 누구나 누릴 수 있다. 입맛에 꼭 맞는 일을 찾겠다는 소극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작은 일 도 가치 있는 일로 바꿔 보겠다는 적극적인 생각이 필요하다. 그런 마음가짐은 Dirty(더럽고), Difficult (힘들고), Dangerous(위험한)의 고된 일도 Dream(꿈이 있는), Dynamic(역동적인), Dramatic(드라마틱)의 귀한 일로 바꾸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의 가치란 그것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직업인 우로서 우리들은 어떤 태도를 갖춰야 할까? 직장에서 기쁘게 일 하는 우리들의 모습은 무엇인지 살펴보자.

의심이 가져다 준 결과.

영화 -블루레이 다우트(DOUBT) 카톨릭 학교인 성 니콜라스를 배경으로 학교 안에서 일어나는 수녀와 학생의 이야기 에서 잘 말해주고 있다. 순진한 수녀 제임스(에이미 아담스)는 흑인학생(도널드)가 이상한 모습을 보여 흑인 학생 에게 의심을 품고 교장 선생님에게 사실을 고함으로써 작은 의심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지를 잘 보여준 영화이다. 종교 에 있어선 의심이 아닌 믿음이 요구되지만 사회인은 입장이 확연히 다르다 믿음을 전재로 한 부분이 빠진 사람들은 나약하고 어리석음 때문에 의심에 빠질 수밖에 없다. 특히 아무리 작은 의심 이라도 의심이 생기는 순간 그 사람에 대한 믿음은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에 경영인과 책임자를 의심을 같게 된다면 직장생활에서 경영인 이나 종업원의 입장에서 발전과 비전은 없는 것이다. 그저 돈 버는 기계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믿고 선택을 하기로 마음을 굿혔다면 끝까지 초심의 마음이 변하지 않는 것이다. 내일에 대한 의심과 두려움 상사에 대한 불심임 한 번 생긴 의심은 비록 그 의심 이 풀리더라도 앙금이 생겨 예전의 믿음을 다시 회복 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현실 세계의 인간들은 宥罪(유죄)墜穽(추정)이 원칙이고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우면 진위 여부를 떠나서 의심이 사실이라고 단정하는 경우가 많다. 이 영화 속에서와 같이 인간이 어떤 사실의 진실 여부를 판단하기는 정말 어려운 경우가 많은데 가끔은 정말 전적으로 믿음과 신뢰를 하고 싶은 때가 많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세상과 그런 믿음과 신뢰를 갖지 못하는 내 모습을 보면 씁쓸한 뿐이다.

숨겨진 내 안의 힘!

미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한 엄마가 세 살 먹은 아이를 데리고 동물원에 갔다. 사자 울타리 앞에서 사자를 구경하고 있는데 엄마가 잠시 한눈을 파는 순간 아이가 없어졌다. 어린 사자가 너무 예뻐 좀 더 가까 이서 보려고 아이가 울타리의 좁은 쇠창살 사이로 들어간 것이다. 아이를 찾던 엄마는 사자 우리 안에 있는 아이를 보는 순간 눈이 확 뒤집혔다. 저 안쪽에서 어미 사자가 어슬렁거리며 아이 있는 곳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순간 엄마는 달려가 쇠창살을 벌렸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 아이를 안고 다시 밖으로 뛰쳐 나왔다.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구경하던 모든 사람이 깜짝 놀랐다.

이후에 실험을 했다. 똑같은 쇠창살을 그 엄마에게 벌려 보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쇠창살을 벌리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인간 내면에 숨겨진 뇌의 힘 때문이다. 엄마가 아이를 구하러 들어가는 순간, 어미 사자 가 자기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굵고 튼튼한 쇠창살을 과연 자신의 힘으로 벌릴 수 있을지 ‘의심’이 들었을까? 그 순간 엄마는 아이만 보였지 ‘두려움’ 이나 ‘의심’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태초에 창조주께서 사람을 만드셨을 때 이런 엄청난 힘을 사람의 몸 속에 이미 숨겨 두셨다. 의학적으로는 이 힘을 항상성 (恒常性, Homeostasis) 이라 부른다. 오늘날 이 항상성이 면역과 자생력을 발전시켜 환자의 질병을 회복 시키는 심리적 부분에도 사용 되어지기 때문이다.

의심과 두려움은 능력을 마비시킨다

앞에 너비 30센티미터, 길이 100센티미터인 철골 구조물이 놓여 있다고 해 보자. 바닥에 깔려 있는 너비 30센티미터 길을 100센티미터 정도 걸어가지 못할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이제 이 철골 구조 물을 높은 빌딩 옥상 위에 가로질러 걸쳐 놓았다고 생각해 보자. 과연 몇 사람이나 건너갈 수 있겠는가? 똑같은 길인데 앞의 경우는 할 수 있고, 뒤의 경우는 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길은 같지만 사람의 마음 이 두려움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두려움이 작동하면 사람은 꼼짝할 수 없게 된다. 한번 두려움의 홍수에 빠지면 모든 것이 마비되고 만다. ‘할 수 없다.’는 부정적이고 체념적인 감정에 굴복하고 마는 것이다. 지성도, 감성도, 의지도, 판단력도 모두 마비되어 버린다.

의심은 가능성을 잠재운다

의심(疑心)은 상대방을 믿지 못하여 이상하게 여기는 감정이다. 일반적으로 타인을 의심하는 것은 시민도덕 에서 시민 에서 나쁘게 인식 되고 있으나, 다른 견해로는 적당한 의심이 있어야 일상 생활이 가능하다는 설이 있다. (위기백과) 일부 정신적인 철학과 도덕에서는 의심이 일종의 공포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어려서 부 터 부모님에게 부정적인 암시를 많이 받으며 살아왔다. “남자는 울면 안 돼!” “여자는 헤프게 웃으면 안 돼!” “안 돼, 하지 마!” “너는 할 수 없어. 포기해!” 우리는 이러한 말에 무의식적으로 암시를 받으며, 평생 말의 최면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두려움과 의심이라는 부정적인 힘이 사람의 몸 속에 들어 있는 창조적인 힘, 곧 항상성을 막고 있는 것이다. 일을 감사히 여기고 게으름을 경계하라. 그것이 현대의 직업인이 갖춰야 할 바람직한 태도이며 그 일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 자세가 필요할 때이다.

< 칼럼리스트 윤상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