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울고싶다

그런데 울수가 없다.
그냥 주저앉아서 울어버리기엔 너무나 일이 많다.
아니, 어쩌면 내가 나를 더 바쁘게 만들어가는지 모르겠다.
한가해지면 슬며서 그 두려움이라는 놈이 나를 삼키려고 하기에
난 더 일을바쁘게 만들어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 난 무척 부지런하게 살려고 한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든지 최선을 다해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
람이다. 내가 11살 때 일로 기억이 된다.
그때에는 내 키가 보통아이들보다 훨씬 컸었다.
어쩐일인지 내 키는 중학교 2학년때 더자라기를 멈춘것 같다.
그 큰키 덕분에 국민학교 체육선생님께 뽑혀서 농구 선수나 송구 선수를 하라고
추천을 받게되었는데 조건은 큰키 이외에도 키에 비해 유난히 긴팔이었던 때문인 것으로
기억이 된다. 농구를 하려고 농구부에 갔는데 나보다 더 큰키의 소유자들이
주전멤버로 뛰는 통에 벤치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아지자
난 은근히 내자존심에 부아가 나서 농구선생님께 나는 농구보다는
송구를 더 좋아하니 송구부로 가겠다고 알린후 당장 송구부로 옮겨갔던 기억이 있다.
뭐라하시는 농구선생님을 뒤도 않돌아보고는 송구부로 갔던 기억이 난다.

다행히도 송구부에는 그다지 특출한 선수들이 없어서 나도 주전멤버에 끼이게 되었는데
나의 열심인 근성( 예전엔 악바리 근성 이라고 했다)때문에 더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연습을 하였던 기억이 있다.

송구는 안에 들어가 있는 상대방 사람들을 공을 맞추어서 밖으로 내보내는
게임인데 나는 잘하는 선수가 되기 위해서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자마자
지금은 돌아가신 오빠와 함께 집동네 넓은운동장에서 오빠친구들 몇명을 불러내어 밤이 늦도록 까지 연습
을 하고는 다음날 또 학교에 가서 연습을 하여 이미 오빠들의 공에 익숙하여진
내공의 스피드와 공의 힘은 상대방을 맞추기엔 아주 좋은 역활을 하였다.

주어진 일에는 최선을 다하는 성격탓으로 연습을 얼마나 하였든지 내가 속한 우리 팀은
게임에 승승장구를 하면서 내가 국민학 교 졸업반때에는 전국국민학교 송구 대회에
나가서 우승을 하여 금메달을 받았던 기억이 새롭다.

그런데 마지막 송구 시합을 앞둔 전날, 나는 손을 높이들고 날라오는 공을 받으려다가
팔이 뒤로 꺽여지는바람에 너무나 큰 통증에 주춤하며 뒤로 물러서면서도 공을 놓치치 않으려했다.
그날 우리 팀은 준준결승에서 이기고 다음 다음날 준결승게임까지 가게 되었는데
그 전날 뒤로 공을 받다가 뒤로 꺽이어진 팔이 붓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몸에 열이 나면서 밤새도록 식은땀을 흘리며 절절 맬정도로 통증이 왔다.

물론 내가 아프다면 그 다음날에 있을 마지막 결승게임엔 나갈 수 없는것이 분명하고,
그리고 나는 그게임에 꼭 나가서 우승을 하고 싶어서 식은땀이 날정도의 통증을
갖고서 집으로 돌아와서 도 아픔을 참아가며 엄마에게 약간 팔이 아픈데요?
라고 말씀을 드리니 엄마는 그러면 접골원에 가서 기브스를 해야 한다는것을
나는 그 원하던 송구 시합에 출전하기 위해 아프지는 않고 그냥 열만 조금 나니까
열만 식혀달라고 했던 기억이난다.

엄마는 무슨 진통제 한알을 숟가락에 올려놓고 다른 숫가락으로
으깨시더니 물에 살짝 개어서 내 입에다 약을 넣어서 먹여주시면서
생감자를 강판에 갈으시더니 간감자에 밀가루그리고 치자가루를
섞어서는 내가 아프다는 팔부위에 마치 옷을 입히듯 꼭꼭
둘러발라주시면서 가제 수건으로 둘둘말아서 싸매어 주셨던 기억이 난다.

엄마의 진통제는 한두시간 효과가 있었고 엄마가 둘둘 싸매어주신
생감자 치자가루 밀가루 반죽은 시원하기는 하였어도 몇번을 갈아내고
( 자꾸 말라가니까)도 내팔의 통증을 덜어주지는 못하였는데
나는 그다음날 있을 시합에 꼭 나가고 싶어서 그머리 에불이 날것같은
통증과 숨을 쉬기 조차 힘든 아픔을 어린마음에 속으로 되내었다.

아픈것은 없어질꺼야!
이젠 않아파!
나는 잘 잘꺼야!
아무튼 말로 형언할수 없는 팔의 통증은 밤새 나를 괴롭혔는데 에도
난 그다음날 시합에 출전하여서 맹활약을 하였던 기억이있다.
그때에 다쳤던 내 오른팔은 나중에 살펴보니 팔이 위로 뻗치며
뒤로 꺽이여지면서 근육이 파열되어서 평생을 나를 고생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나중에 모든게임을 마치고 전국국민학교 송구대회에서 우승한 우리 팀이 금메달을 목에걸고 난 후 팔이 너무나 아파서 주저앉아버린 나를 보신 엄마는 세상에 정말로 독한 계집애라며
나를 병원에 데려가셔서 치료를 받게 해주셨지만 그 아픈팔은 평생을
나를 괴롭히는 요인이 되었다. 마지막 게임을 앞두고 팔이 너무 아파서
머리에 열이 나고 온몸 이 아픈데, 12살인 나는 우리 팀들이 내가 아픈것을
알게되면 마음들이 흩어질까봐 꾹꾹 참고서는 아무도 않보는 곳에서 물을틀
어놓고 엉엉 울었었다. 팔이 너무나 아파서…..

내가 눈에 이상이 있어서 수술을 하고 왼쪽 눈의 상태는 안개낀
것같은 막이 없어지고 눈이 밝아졌는데 오른쪽 눈이 심각했던것
을 몰랐던 나는 오른쪽 눈의 심각성을 왼쪽눈을 검사하러 갈때에
알게되어 급하게 왼쪽 눈을 먼저 수술을하고 이틀후에 오른쪽 눈을 수술을 했는데
오른쪽 눈은 치료하기전보다 더 않보이고 눈앞에서 광선이 번쩍거리고
불꽃놀이가 벌어지는듯한 느낌과 가끔씩은 눈을 찌르는 듯하는 통증에
머리까지 아파서 견디기가 힘들었다. 고개를 들어도 아프고, 고개를 숙여도 아프고,
똑바로 서있자면 머리에 통증이 생기고… 너무나 불안해지는것은 이러다가 눈이
안보이면 어쩌지! 라는 불안감 이었다.

큰언니가 나와같은 증상으로 두눈의 시력을 거의 잃어버리고 지금은 운전대를
놓은지 한참이다. 생각을 하면 몰려오는 두려움, 혹시나! 하는 염려…
이러다가 정말로 않보이면 어쩌지! 하는 걱정…생각을 하지 말아야 했다.
생각이 나면 그생각을 잊어버릴려고 머리를 흔들어대고는 하였다.
그래서 더욱 바쁘게 무엇인가를 하고는 했다.
아침마다 새벽워킹을하고 밤이면 밤마다 걸었다.
다행히도 내가 사는 지역에 샤핑몰이 새벽부터 걷는 이들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눈수술을 하느라고 한달간을 병가를 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