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 주의 – 정열의 힘
이성을 중시했던 신 고전주의에 반발하고 일어난 낭만 주의는 감수성을 특히 중요시 했으며, 작가와 화가 모두 이성적인 객관주의보다 감성과 직관에 의존했다. 독일의 낭만주의 풍경화가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는 “예술가는 자신의 앞에 보이는 것뿐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 있는 것까지도 그릴 줄 알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자신의 정열이 이끄는대로 극한까지 추구해 갔던 낭만주의자들은 착실한 삶보다는 강렬한 삶을 택했으며 우리에게 익숙한 낭만주의 시인과 작곡가인 쇼팽, 슈베르트, 셀리, 키이츠, 바이런 모두가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낭만주의를 일컫는 로맨티시즘이라는 용어는 로망스라는 중세의 이야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당시는 중세풍의 흑마술과 신비주의적 요소가 뒤섞인 무시무시한 이야기들이 인기를 끌었으며 (<프랑켄슈타인>과 같은 소설이 이 당시에 씌어진 것이다) 이러한 중세풍의 취향은 런던 국회의사당 건물의 탑과 망루에서 엿볼 수 있다. 실내 장식에도 중세풍이 유행하였다. 월터 스코트 경은 고딕 양식의 모조성을 축조했는데 소설가 호레이스 월폴이 이를 보고 ‘고딕풍의 창을 통해 중세풍의 장난간 집을 엿본 느낌’ 이라고 적고 있다.
낭만주의의 또 다른 특징은 자연에 대한 숭배열이다. 터너와 컨스터블 같은 화가는 풍경에 영웅적인 요소를 가미함으로써 풍경화의 위상을 높혔다. 인간과 자연은 어떤 초자연적인 힘을 통해 서로 감응할 수 있으며 인간 내부에 숨겨진 신성함을 끌어낼 수 있다고 믿음으로써 낭만주의자들은 직관에 의지하여 그들의 신조를 지킬 수 있었다.
프랑스의 낭만주의
테오도르 제리코는 단하나의 작품 <메두사 호의 뗏목>으로 낭만주의의 진수를 보여 주었다. 이것은 당대 정치적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던 배의 조난 사고를 약 7m x 5m나되는 거대한 캔버스에 묘사한 것이었다. 제이코는 마치 기자처럼 이 사건을 취재하고 생존자들을 만나 당시의 처절했던 체험담을 직접 들었다. 그는 시체를 관찰하고 처형당한 죄수의 머리를 직접 스케치 하는 등 이 사건을 보다 정확히 묘사하고자 노력하였다. 그의 특이한 작업 과정은 그림의 세부묘사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149명의 승객들은 무책임한 선장과 선원에게 버림받고 물도 식량도 없이 12일 동안이나 표류했으며 결국 기아로 서로를 잡아 먹기까지 하는 등 버텼지만 구조선에 발견되었을 때 생존자는 오직 15명 뿐이었다. 당시 나체인 승객들의 긴장되고 비틀린 육체는 그들이 삶을 위해 얼마나 격렬하게 투쟁했는지를 보여 주며 작가의 감수성이 더해져 더욱 드라마틱하고 서사적인 작품으로 탄생했다. 이 작품은 당시 사건과 정부의 무능력을 비난하는 정치적 의미 때문에 큰 충격을 주었다. 낭만주의의 열정이 처음으로 과거의 이상화가 아닌 당대의 진실을 포착하는 데에 쓰여진 것이다. 이순간부터 프랑스의 미술은 지성보다 감성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흐르게 되었다.
사생활에 있어서도 안락한 삶을 원하지 않았던 제리코는 자신의 안위에 연연치않고 학대받는 자들을 감싸고 정열이 명하는 대로 살았다. 10년이 넘는 작품활동 기간동안 오직 세 작품만을 남겼지만 지울 수 없는 거대한 발자취를 남긴 제리코는 마상 사고로 32살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J Art Academy
원장 이준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