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델란드 바로크의 3대 거장 (1)
지난호에서 언급했던 것 처럼 네델란드 바로크 3대 거장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미술사를 공부하지 않았다고 해도 렘브란트라는 화가를 아는 이는 많을 것이며 베르메르라는 이름은 잘 모르더라도 그의 그림을 기억하는 이들 역시 많을 것이다. 그에 비하면 할스는 그림도, 이름도 생소한 화가일 것이다.
가장 많이 알고 있을 렘브란트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 해보자. 아마도 서양 미술역사상 가장 유명한 화가가 아닐까 생각된다. 중고등학교 시절 미술 수업을 통해서 거장들의 그림을 접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아마도 렘브란트의 그림을 접하면서 화가의 꿈을 키운 사람이 상당히 많을 것이다. 물론 필자도 렘브란트의 그림들을 보고 화가의 꿈을 키웠었다. 렘브란트는 유명한 초상화가였다. 렘브란트의 명성은 무엇보다 말년의 깊이 있는 감정을 보여주는 그림을 통해서 얻어진 것이다. 그는 초상화가로서 명성을 날렸고 주문도 많았다고 한다. 그는 수많은 작품을 만들어냈지만 이렇게 주문 제작을 하는 상황이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 회화는 화가가 완성되었다고 느껴야지만 완성이다.” 라고 말했던 그의 생각은 초상화가 자신들의 시간에 맞추어 완성되기 원한 주문 고객들과 늘 갈등을 겪게 했기 때문이다. 또한 렘브란트는 성경과 역사 속의 이야기를 바로크 양식으로 그려 작품을 남기기도 하였는데 그런 작품속의 인물들은 드라마 같은 감정을 드러내고 있어 매우 극적인 느낌을 주기도 했다.
특히나 < 야간 순찰대(혹은 야경)>가 그려진 1642년은 렘브란트의 생애에 전환점을 이룬 해였다. 이 작품은 암스테르담의 사수협회의 주문에 의한 단체 초상화인데 그는 당시 유행하던 기념 촬영적 기법의 단체 초상화에 만족하지 않고, 렘브란트의 특유의 명암 효과를 사용하여 극적이고 대담한 구성을 시도하였으나 사람들로 하여금 인정을 받지는 못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까지 겹쳐 그는 실망과 곤궁속에 빠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위대한 예술가로 만들어준 예술이 전개되기 시작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렘브란트는 점차 바로크 양식의 초상화 작업을 버리고 보다 깊이있고 조용한 스타일로 옮겨가기 시작 하였다. 성숙기의 그의 작품은 육체적인 표현 보다는 심리적인 통찰력에 더욱 촛점을 맞춰 표현 되었다. 그는 성경속의 주제를 더욱 파고 들었는데 그것을 보다 억제된 방식으로 표현 하였다. 색채는 붉은색과 갈색이 주를 이루었고 고독한 인믈들의 쓸쓸한 분위기가 스며드는 듯한 주제를 다루었다. 렘브란트는 명암의 단계적 변화를 통해 분위기와 성격, 감정을 전달함으로써 명암 대조법 사용에 있어서 최고봉을 이루고 있다.
또한 그는 역사상 에칭 판화를 가장 잘 다룬 화가였다. 그의 바늘을 다루는 능력은 매우 빠르고 솜씨가 있어 스케치화의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회화 기법을 보면 자잘한 세부묘사에서 거대한 스케일의 작품에 이르기 까지 그의 회화적인 테크닉은 대답하고 두꺼운 물감 사용법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빛의 효과를 최대한 활용하여 색채및 명암의 대조를 강조함으로써 의도하는 회화적 효과를 얻었다는 점이다. 그를 일컽어 ‘혼의 화가’, ‘명암의 화가’ 라고 하는 것은 작품의 대상에 대해서는 사실적이지만, 빛의 효과에 대해서는 최대의 이상주의자였기 때문이다. 즉, 색이나 모양이 모두 그 자체이며, 명암을 통해 생명의 흐름을 표현했다. 렘브란트 그는 화려한 붓놀림, 풍부한 색채, 하늘에서 쏟아지는 듯한 빛과 어두움, 강력한 힘과 내면을 꿰둟는 통찰력으로 빛과 어둠을 훔친 화가였다.
J Art Academy
원장 이준규
<야간 순찰대 (야경)> 국립미술관, 암스테르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