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델란드 바로크

네델란드는 프랑드르와 인접하고 있지만 두 나라는 정치, 문화적으로 매우 달랐다. 프랑드르는 구교가 지배하는 왕국이었고 네델란드는 신교가 지배하는 독립된 민주주의 국가였다. 그러한 이유로 네델란드에서는 종교화가 금지되어 있었고 성당, 왕실, 귀족 계급과 같은 미술의 주요한 후원자들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한 배경은 미술의 주제와 소유권을 자유롭게 만들었으며 미술가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미술판매 시장을 통하여 그들의 작품을 거래하게 되었다.특히 그 시기에 부유해진 네델란드 중산계층들이 미술품 수집에 열성적이 었고1640년 당시 암스테르담 사람들은 “그들은 미술품의 질과 작품을 보는 혜안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높았다.” 또한 “모든 사람들이 값비싼 미술품으로 자신의 집을 치장하는 데 열성적이었다.” 라고 일컬어졌다.

미술품의 수요는 끊임이 없었다. 심지어 고기나 빵을 파는 상점에서 수리점에 이르기까지 미술품을 걸어 놓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러한 열성적인 미술품 수집열은 수많은 화가들과 높은 수준의 미술품을 쏟아져 나오게 하였다. 화가들의 계층도 정물화, 풍경화, 실내화, 동물화 등등 각자의 특징에 맞게 세분화가 되었다. 17세기 네델란드에는 정물화 한분야에서만도 500명이 넘는 화가들이 활동 했다고 한다. 네델란드 바르크 미술은 1610년에서 1670년 사이에 꽃을 피우게 되었으며 그 양식은 사실적이었고 주제는 일상적인 것이었다. 대부분의 네델란드 화가들은 묘사에 탁월했고 보수적인 성향이 강했으므로 자신의 특성화된 분야만 되풀이 해서 그렸다. 하지만 다음호에 소개를 할 네델란드를 대표하는 거장 할스, 렘브란트, 베르미어 같은 이들은 능란한 기교를 넘어서 독창적인 경지에 들어선 화가들이다.

종교개혁 이후 네델란드 바로크시대에서는 정물화가 회화의 한 장르로서 발달하게 된다. 비록 다른 나라에서는 열등한 회화형태로 무시 당했지만 17세기 네델란드에서는 뛰어난 사실주의적 기법으로 정물화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때때로 정물화에 해골이나 피어 오르는 양초를 그려넣어 인생의 덧없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또 다른 장르인 풍경화 역시 네델란드에서는 독립된 장르로 그려지기 시작을 하였다. 이전까지의 풍경은 그림 전면의 주제 뒤에 그려지는 배경에 불과 하였지만 이제는 하나의 주제로 그려지기 시작 한 것이다. 푸생이나 클로드 로랭에 의해 이상화된 풍경화가 발달했던 프랑스와는 달리 우리에겐 이름이 생소한 알베르트 쿠입이나 판 루이스댈 같은 네델란드 화가들은 광대한 하늘에서 떠다니는 구름을 즐겨 그렸으며 자연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데 치중을 하였다. 특히나 이들 중 그 시대에 가장 뛰어난 풍경화가인 판 루이스탤은 세부묘사에 치중하면서도 하늘, 냇물, 들판과 같은 거대한 공간을 강조했으며 거기에 우수어린 부위기를 자아내는 구름, 그리고 드라마틱하게 강한 빛과 그림자의 대조를 표현 하였다. 그는 이와 같이 큰 스케일과 우수어린 분위기 때문에 동시대의 여느 풍경화가 보다 단연 우위를 차지 하였다.

이번호에서는 다소 생소할 수있는 네델란드 바로크에 대해서 간략하게 이야기 해 보았다. 이 시기는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한 시기이지만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세 거장들이 활약하였는데 순간의 화가 할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 렘브란트, 그리고 빛의 화가 베르미어가 그들이다. 다음 호에서는 이 거장들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기로 한다.

J ART ACADEMY

원장 이준규


루이스 댈 <풍차가 있는 풍경, 국립박물관, 암스테르담>

헤다 <정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