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매자 옵션


주검이 무엇인지 알려면 죽어봐야 한다. 그래서 나온 말이 “먼저 죽을 사람 없다”와 “쥐들의 회의”라는 말이다. 앞의 말은 경험할 수 없는 내용을 다룬다는 뜻이고 뒤의 말은 실현 불가능한 일을 가지고 공론을 되풀이 할 때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많이 아파보지 않은 사람은 깊은 병을 앓는 사람의 심정과 고통을 알기가 참 어렵다. 막연하게 좀 힘들겠거니 하는 정도로만 알 뿐 실제로 얼마나 힘들지 알 수가 없다. ‘억울하면 출세하라’가 아니라 ‘아프지 말아야한다’가 오히려 정답이 될 수 있다.

최근 30여 년간 병원에 갈일이 없던 필자가 해외여행에 필요한 예방접종을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기에 서울 근교에 있는 대학병원을 찾은 일이 있다. 몸이 아파서가 아니라 단순히 예방주사를 맞으러 간 길이었다. 그런데 한참을 앉아있자니 문득 ‘많이 아픈 환자는 환자 대기실에서 죽을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 환경이 그렇게 복잡한 줄 몰랐다. 접수를 하고, 수납을 하고, 인지를 사고, 진료실을 찾아가야 하는데서 오는 번거로움이 그만큼 심했다. 새삼 몸이 건강하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를 깨닫는 순간이었다.

더욱 안타까웠던 점 하나. 아프리카 여행은 TV에 나오는 오지 탐험이 아닌데 여행에 전혀 필요도 없고 도움도 되지 않는 예방접종을 권한다는 사실이었다. 오지 체험 여행은 밀림이나 원주민들이 사는 곳들을 찾아가므로 예방 접종이 필요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일반 여행객들에게는 전혀 필요 없는 일들을 권함으로써 불필요한 경비는 물론 시간 낭비로 사람들을 짜증나게 만드는 것은 참 실망스러운 일이었다. 보름 정도 여행을 다녔던 케냐, 보츠와나, 남아공화국, 잠비아, 짐바브웨 등의 호텔에는 모기장과 살충제 스프레이가 구비되어 있고 좀 고급호텔에는 비데까지 설치되어있다. 그런데도 우리에게 아프리카는 모기에 물리면 당장 말라리아에 걸리는 나라쯤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니 아프리카 여행객이라면 무조건 그런 질병에 대비하기 위한 예방접종을 마쳐야 한다. 답답한 노릇이지만 만에 하나 있을 위험한 상황에 대비하기 위함이라니 공연한 메아리만 날릴 뿐이라는 생각과 함께 “쥐들의 회의”라는 말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학생이 시험문제를 내지 않고 선생님이 출제한 문제를 푸는 것이 시험이고 내가 뽑고 싶은 지도자를 뽑는 것이 아니고 이미 입후부한 사람을 억지로라도 뽑는 것이 선거이다. 마찬가지로 병원에 가면 환자 선택권은 없고 오로지 의사의 선택 내지는 권리 밖에 없는 현실에서 의료의 경우 소비자가 선택하는 옵션이 거의 전무하기 때문에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정말 아프지 말아야 한다.

상품을 선택하는데 소비자 임의로 선택하는 것을 소비자 옵션이라 하고 판매자가 옵션을 가지고 파는 경우를 판매자 옵션, 아무 곳에도 걸리지 않은 것을 옵션의 사각지대라 한다면 소비자가 백화점 같은 데서 자기가 원하는 물건을 임의로 고를 때는 소비자 선택이니까 소비자 옵션이지만 가장 강한 판매자 옵션은 누가 뭐래도 의료 행위를 하는 의사들이 가지고 있는 옵션이 아닐까 한다. 그 외에 건강식품 같은 물건을 파는 행위가 아마 옵션의 사각지대에 속한 것이 아닐까?

소비자에게 선택권이 전혀 없는 상품 즉 판매자 옵션에만 걸려있는 상품을 구매해야 하는 소비자 입장을 한번 생각해 보면 이 옵션처럼 답답하고 갑갑한 경우란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판매자 옵션은 공권력으로 보호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남용되고 마구잡이로 사용된다고 해도 이를 막을 길이 없는 것 또한 심각한 문제이다. 판매자 옵션을 쥐고 있는 사람들은 이보다 더 좋은 옵션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에 이 옵션은 누가 건드리기라도 하면 목숨을 걸고 지키려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China Report’라는 책이 있다. 미국 학자들에게 용역을 줘서 중국인들의 건강문제를 정리한 베스트셀러인데 거기에 미국인의 사망원인 3위가 의료 사고로 나와 있다. 공권력으로 보호 받는 의료행위라는 판매자 옵션에 의해 죽는 사람이 미국의 경우 사망원인 3위라는 사실을 보면서 아직 이에 대한 통계가 없는 우리나라에서는 과연 몇 위나 될지 한번 의심을 가져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