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을수록 차분히 다시 시작하기
필자가 이 글을 쓰는 월요일은 독자께서 이 칼럼을 받아 보시는 주말과는 인쇄와 출판 등의 준비로 거의 한주일의 차이가 난다. 이 글을 쓰는 시점과 이것을 읽으시는 때의 상황은 우리가 예상 못하는 큰 차이가 있을 수도 있고, 그저 큰 변화가 없이 현상이 유지되는 것일 수도 있다. 오늘의 미디어는, 미국에서 7월의 고용지표와 제조업 경기지표가 악화된 영향으로 한국(-8.7%), 대만(-8.35%)과 일본(-12.4%)의 증시가 팬데믹과 글로벌 금융위기를 뛰어 넘는 역대 최대의 폭락장을 기록했다고 난리들이다. 우리네 서민들에게도 영향이 없지는 않을 것이니, 모쪼록 조만간 경기가 잘 회복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런 소용돌이의 세상에서 필요한 것은 이 물결에 휘둘려 마음이 요동하는 것보다는 마음속 깊은 곳을 바라 보며, 기독교에서 말하는 소위 ‘영적 성숙’을 목표로 마음을 다스리는 ‘묵상’이 필요할 지도 모른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묵상은 내 마음을 채우고 있는 욕심이나 두려움 등을 하나님의 말씀 등에 근거해 비워 버리고 그곳을 하나님의 성품인 거룩함과 사랑으로 채우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성경에서 두려움은 사랑이 없음에서 생기는 것이요, 욕심은 거룩함과 반한다고 하니 이해가 된다. 이러한 정의의 진위 여부를 떠나, 이러한 노력들이 우리 자신을 억누르고 있는 거짓된 의식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찾으려는 의지적 행위라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아주 조금만 걱정해도 될 일을 지나치게 생각해 그 덩치를 필요 이상으로 키워 그 짐에 억눌려 허덕이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 억누름의 본질을 밝혀 무게를 줄여 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억누름의 살을 빼려는 노력 하나. 한가지 질문을 여러분과 나 자신에게 묻는다: 아침에 일어 나서 제일 먼저 무엇을 하십니까? 내가 무의식적이고 습관적으로 하는 것들을 돌아 보았다. 예를 들어, 언제부터인가 매일 아침 일어나 비몽사몽간에 하는 첫번째 행동 중의 하나가 이메일을 확인하는 것이 되었다. 나도 모르게 그리 달갑지 않지만 거의 굳어진 일상의 습관이 되었다. 뭐 그리 내세울 만큼 독실하지는 않지만 크리스천인 필자가 그것을 그리 마땅치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잠에서 깨어나 (또는 거창하게 표현하자면, 죽음과도 같은 잠에서 깨어나 부활한 후에) 하는 첫 행위가 다시 살아나 삶을 계속하게 해 주신 이(또는 적어도 같이 격려하며 기쁨을 나누는 가족)에 감사하는 마음을 표하거나 묵상하는 일이 아니라, 아무 생각없이 다시 세상사의 얄팍한 정보/지식 획득에 나 자신을 바친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러한 세상사와의 첫번째 조우는 우리에게 많은 경우 걱정과 근심을 제공하는 시발점이 된다. 오늘 그랫듯이 이메일로 배달되는 몇가지 뉴스만 보더라도, 리 올림픽에서 안세영 선수의 금메달 소식처럼 행복하고 유쾌한 것보다는 대부분이 암울한 사건 사고 소식임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좋은 소식 또는 나쁘지 않은 소식을 신청해 받는 것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몇몇 사이트를 찾아 구독하고 있다. 이메일 중에 매일 규칙적으로 받는 것들이 있는데, 몇가지만 들자면, ‘word of the day (dictionary.com),’ ‘The Morning (New York Times),’ 그리고 ‘Richard Rohr Daily Meditation (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등등이 있다. 대부분 무료로 받아 보는 기분 나쁘지 않은 일일 정보들인데 (뉴스를 제외하고), 요긴한 것들이 많으니 독자분들께서도 직접 한 번 확인해 보시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제 지난 8월1일에 공통 원서가 열리자, 원서를 준비하느라 허겁지겁하는 몇몇 학생들이 떠오른다. 이들은 아마 시간이 좀 더 연장되면 얼마나 좋을까 소원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헛된 희망을 겪고 또 겪어 온 어른인 우리는 모두 안다. 우리네 경험으로 체득한 지혜는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으니, 아이에게 지금부터 밤을 새더라도 닥친 일들을 애써 준비하면 마음도 편해 지고 좋은 결과도 있을 것임을 말해 주면 될 것이다. 이쯤에 이르자 몇 년 전 어느 학생의 체념적인 고백이 떠 오른다. 원서 마감은 다가 오고, 준비는 안 되어 있어 거의 절망적인 이 녀석, “선생님, 만약 원서의 에세이 난을 백지로 내면 어떨까요?” “혹시 굉장히 철학적인 지원자로 판단해 합격시키지 않을까요?” 물론 답답한 마음에 농으로 한 것을 알기에, 꿀밤을 한 대 먹이며, “그래서 각 대학들이 최소250 단어 정도 길이로는 써야 한다고 정해 놓은 거야 이 녀석아.”
좀 문맥이 다르기는 하지만, 이 ‘백지’ 철학은 오랜 기간 교육자들의 머리를 어지럽혀 온 주제였다. 교육 현장의 ‘백지’라는 표현은 “인간은 ‘백지 상태’로 태어나며, 교육과 경험으로 자신의 인생 그림을 그려 나가는 것”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존 로크와 같은 경험주의 철학자들이 사용하기 시작한 이것의 라틴어 어구가 더 익숙하신 분들이 있으실 것이다. 바로 ‘tabula rasa (blank slate, 빈 칠판, 잘 닦여진 서판)’이다. 즉 인생은 이렇듯 새롭게 잘 닦여 있는 칠판 위에 인간의 오감을 통해 받아 들이고 이해한 내용들을 써 내려 가는 것과 같다는 의미이다.
우리 아이들이 백지 상태로 태어났다면, 그들이 자신만의 아름다운 그림들을 그려 나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우리네 부모들의 역할이리라. 하지만, 우리 모두가 그랬던 것처럼 누구나 실수를 하며 그것이 우리 마음의 캔버스를 어울리지 않는 색과 모양으로 더럽힐 수 있다. 틀렸다고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 깨끗이 지우고 다시 시작하도록 격려해 주면 좋을 것이다. 그러니 예수께서 우리의 더러운 죄들을 깨끗이 용서해(지워) 주시고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 아니겠는가? 마음을 비우는, 지저분한 낙서를 지우는, 묵상이 매일 매일 다시 태어나 백지 상태로 다시 시작하려는 노력일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오늘을 다시 시작한다.
| 벨뷰 EWAY학원 원장 민명기 Tel.425-467-6895 ewaybellevu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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