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인상주의
세잔, <생 빅투아르 산>필라델피아 미술관
후기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 화풍은 선배 인상주의자들의 혁신적인 요소에서 출발 하였다. 이전 호에서 언급했듯이 인상주의 이전에는 실내의 불빛 아래서 회갈색조의 역사화등을 그렸던 화풍이 었다면 인상주의 자들의 화폭은 화려한 무지개 색채로 넘쳐났다. 그러나 후기 인상주의 자들은 그런 인상주의에만 만족하지 않았다. 한 순간의 인상을 포착하는데에만 매달려 때로는 무계획적이고 무분별하게 보이는 인상파의 작품들보다 좀더 본질적이고 구체적인 것을 만들고 싶어했다. 이렇듯이 빛과 색채를 통한 감각과 감정을 표현하면서 형태에 대해 좀 더 충실하였다. 입체주의와 초현실주의 같은 20세기 미술양식은 바로 이 후기 인상주의에서 발생한 것이다. 이 후기인상주의 화파의 중심에는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반 고흐, 폴 세잔, 폴 고갱이 있다. 20세기 미술의 발판을 만들었던 이 세 거장에 대해 이야기 해보도록한다.
세잔( 현대회화의 아버지 )
당시 비평가들은 세잔에 대해서 미친사람 취급을 했다. 그러나 그가 죽은후 비평가들은 “형태라는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라는 격찬을 하였다. 완전히 상반된 평가를 받은 세잔은 40여년동안 어떠한 악평에도 굴하지 않고 꾸준히 그만의 생각을 화폭에 담았다. 국립미술학교와 관전에서 거절을 당하고난 후 인상주의 화가들과 전시회를 같이 하면서 야회 풍경화에 매료되기도 했지만 세잔은 어느 화파에 속하기에는 너무나도 독자적인 화가였다. 인상주의 화가들 사이에서도 괴짜로 통했다. 그의 독특한 회화 스타일 때문에 그를 촌사람 취급을 했으며 그의 그림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도 냉혹하기만 했다. 천하고 상스럽고 퇴화한 그림이라거나 능력 부족이라는 평을 많이 받았다. 첫 인상파 전람회 후 많은 상처를 받은 세잔은 귀향을 하여 그림에만 전념을 하게 된다. 첫 개인전후에 비로서 세잔은 젊은 화가들 사이에서 범접할 수없는 화가로서 대접을 받게 된다.
세잔의 미술이 동시대에는 급진적으로 받아들여졌으나, 지금은 현대 회화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이유는 화면의 형태를 다루는 새로운 방식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외형만 모방하는 대신 세잔은 자연의 본질적인 기하 도형의 구조를 통찰하고자 하였다. “모든 형태를 원, 원기둥, 육면체 등으로 환훤해서 해석하라”는 것은 그의 유명한 말이었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그는 특정한 사물의 형태를 단순화 시켜 본질에 가까운 거의 추상적인 형태로 표현했다. 필자도 세잔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학생들의 기초 드로잉 수업시간에 그의 말을 항상 인용을 하며 형태의 본질을 이해하며 쉽게 그림을 그릴 수있게 지도를 하고 있다.
1906년 세잔이 죽은 이후, 1907년 9월에 파리에서 그의 작품들을 모아 큰 박물관 같은 회고전이 열렸다. 세잔의 회고전은 파리에 있는 아방가르의 방향성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세잔의 위치는 19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화가로 격상되었고, 현대회화의 아버지로 평가받았다. 세잔은 20세기 가장 혁신적인 미술 영역에 큰 영감을 주어 현대 미술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J Art Academy
원장 이준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