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바로크
프랑스 바로크
프랑스는 17세기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였으며 이때 왕이었던 루이 14세는 자신의 군주권과 왕궁의 영광을 과시하는데 엄청난 노력을 하였다. 베르사유 궁전을 건축한 이후로 프랑스는2차 세계대전 시기까지 유럽 미술의 중심이 되었다. 유럽 미술의 중심지었던 프랑스 바로크 미술계를 이끌었던 화가로는 니콜라 푸생과 클로드 로랭이있다. 이 두 화가 역시 우리에게는 생소한 이름이지만 이들은 프랑스 미술계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푸생 – 구성의 대가
푸생은17세기 프랑스에서 가장 아카데믹한 화가로서 프랑스인이지만 이탈리아에서 활약을 하였다. 고전작품을 좋아했던 푸생은 고대 로마의 신화, 역사 그리고 그리스 조각상을 모델로하여 자신의 그림을 제작하였다. 그는 고전 작품을 부활시킨 장본인이었고 이후로 두 세기를 거쳐 미술사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푸생의 가장 큰 특징은 고전적 합리주의에 있다. 루이 13세가 르브르 궁의 천장에 날아다니는 성인들을 그리라고 주문을 했을 때 인간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다고 하여 그리는 것을 거절하였던 일화를 통해서도 그가 얼마나 합리적인것에 중점을 두었는지 잘 알 수있다. 그가 미술사에 남긴 또하나의 큰 유산은 회화를 창작하는 방식의 하나인 <장려장식>을 창안했다는 것이다. 그는 “회화 장작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주제와 그 전개방식이 전쟁이나 영웅적인 행동, 종교적인 테마 같은 위대한 것이어야 한다. 다른 비천한 주제들은 되도록 피하여야 한다. 일상의 묘사에 치중하는 화가들은 그들의 열등한 재능을 그런 하급 주제를 통해 합리화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이후 200여년 동안 모든 화가들이 제도화된 고전주의인 푸생의 방식으로 교육을 받음으로 해서 프랑스 미술계는 막대한 영향을 받게 된다.
크로드 로랭– 이상화된 자연
프랑스 바로크 미술계에 유명한 화가인 로랭 역시 푸생과 같이 이탈리아에서 활약 했었다. 이탈리아 시골의 전원적인 풍경을 주로 그렸던 그와 푸생의 차이점으로 푸생은 고전유물에 관심을 두고 작품을 제작했다면 로랭은 자연 그 자체와 새벽녘과 석양의 고요한 빛에서 영감을 얻어 작품을 제작 하였다. 그는 이른 아침과 저녁 이탈리아 시골의 낭만적인 페허와 언덕들, 늘어진 나뭇가지들, 목동들을 즐겨 그렸으며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다른 화가에게 대신 그리게 했다고 한다. 로랭은 인물묘사에는 관심이 없었고 그림 속에 나오는 인물의 역활은 자연의 거대함을 실감나게 하는 조연의 역할만 하고 있게 하였기 때문이다.
베르사이유 궁전– 호화 찬란한 궁전
프랑스 바로크를 언급할 때 베르사이유 궁전을 빼놓을 수 없다. 바로크 미술시대 호화찬란함의 극치 인 베르사이유 궁전은 실은 한사람의 야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짐이 곧 국가다”라고 말하며 절대 왕정을 수립한 태양왕 루이14세가 바로 그이다. 베르사이유의 수백 개의 방은 수정으로 만든 샹들이에와 여러가지 색깔의 대리석, 은으로 장식한 가구들 등으로 장식 되어있다. 이 궁전은 안락함 보다는 시각적 충격에 중심을 두고 있다. 베르사이유 궁전 내부의 화려함과 거대함도 앙드레 르 노트르가 설계한 정원에 비하면 왜소해 보인다. 덩쿨과 숲 대신 그는 수학적으로 정원을 설계하여 잔디, 나무들을 배열하였다. 이런 좌우 대칭적 형태는 자연을 거대한 스케일로 변화 시키고 있다.
J Art Academy 원장 이준규
푸생<포시옹의 매장> 루브르 박물관, 파리
로랭<아폴론에게 재물을 바치는 풍경> 케임브리지 앵글시 사원,
베르사이유 궁전 내부